고대사회의대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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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19-03-18 14:04 조회1,34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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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한시대를 지나면서 한강유역에서는 마한의 54개국 가운데 하나인 백제가 성장하여 백제국으로 발전하였다. 백제국은 한강유역을 배경으로 성장하여 제8대 고이왕(234∼286)때에는 16관등과 6좌평의 명칭과 업무분장을 이루고, 공복제을 실시하는 등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 그후 근초고왕(346∼375)때에는 세력을 더욱 확장하여 전라도 남해안에까지 확대되었다. 이 때에 대전지역이 백제의 영역에 귀속된 것으로 보인다. 백제시대에 회덕이 역사상에 등장하는 것은 백제가 서울을 웅진으로 옮긴 이후부터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사기} [잡지] 제5지리에는 "비풍군(比豊郡)은 본래 백제(百濟)의 우술군(雨述郡)으로 경덕왕이 개명하였는데 지금의 회덕군(懷德郡)이다." 라 하여 회덕군이 백제시대에는 우술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술군은 {고려사} 권56, 지(志) 10, 양광도 공주목조에 의하면 우술군을 "일운오천"이라 하여 오천이라 하기도 하였음 알 수 있다. 즉 대덕구 지역은 백제시대 우술군 혹은 오천이라는 행정구역명을 가진 지역이었다. 백제가 고구려의 압박으로 한강유역에서 웅진(공주)으로 천도후 백제의 동성왕(479∼501)은 ![]() ![]() ![]()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내외의 지배체제를 정비하는 한편 민족융합정책을 취하였다. 그래서 백제와 고구려의 지배층을 신라의 귀족으로 편입을 하는 한편으로 지방행정구역의 개편을 단행하였다. 특히 경덕왕 16년(757)에는 주·군·현의 일대 개혁하여 전국의 군·현을 120개 군, 305개 현으로 개편하고 읍호도 개칭하였다. 이때에 대덕구 지역도 {삼국사기} [잡지] 제5 지리에 의하면 "비풍군은 본래 백제의 우술군으로 경덕왕이 개명하였는데 지금의 회덕군으로 영현(領縣) 둘이다. 유성현은 본 백제의 노사지현을 경덕왕이 개명하였는데 지금도 이에 따른다. 적오현은 백제의 소비포현으로 경덕왕이 개명하였는데 지금의 덕진현이다." > 라 하여 경덕왕이 백제시대의 우술군을 비풍군으로 읍호를 바꾸었고, 비풍군의 영현으로 유성현과 적오현을 그 밑에 두었다. 이처럼 지금의 회덕지역에 있었던 비풍군이 유성구 지역에 있었던 유성현과 적오현을 속현으로 거느린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현재의 대덕구 지역이 이 지역의 중심이 되는 행정구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통일이후 번영을 누리던 신라는 36대 혜공왕 대에 이르면 왕권이 약해지고 귀족들의 세력이 팽창하여 왕위계승을 두고 서로 다투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의 하나가 김헌창의 난이다. 김헌창은 원성왕계이었던 김주원의 아들로 공주도독으로 있었다. 그런데 부친인 김주원이 왕위계승에서 탈락하자 헌덕왕 14년(822년)에 공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무진주·청주·금관경 등을 장악하고, 국호를 장안국(長安國),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하였으나 패전하여 자살하였다. 그런데 김헌창이 공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한때 청주를 점령하였던 것으로 보아 공주와 청주사이의 교통로 상에 위치하였던 대덕구 지역도 난에 휩싸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후기대 이르면 고대사회의 폐쇠성에 따른 모순이 노정되어, 귀족들의 반발로 인한 왕권의 약화와 그에 따른 잦은 왕위의 교체는 왕실의 권위를 떨어뜨리게 되었고, 골품제의 모순에 따른 6두 품들의 도전 등은 신라사회의 해체를 가속화하였다. 그리고 가혹한 수탈에 대항하여 피지배층이 광범위하게 저항하여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빈발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으로 중앙통제력의 약화를 가져와 각 지역에서는 분리 독립화 경향이 심화되어 결국 후삼국이 정립하게 되었다. 이 때 지금의 대덕구 지역은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 지역에 포함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