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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회의대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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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19-03-18 14:04 조회7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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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cient2-1.jpg선사시대를 지나 한반도 충남과 전라도 지역에서는 기원전 2세기에 진국이 존재했었다. 진국을 이은 마한에는 54개국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이었던 신흔국 또는 내비이국이 지금의 대전 진잠과 유성사이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이들 소국들은 대전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는 지석묘 사회와 괴정동이나 탄방동·문화동에서 출토된 청동기사회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삼한시대에는 괴정동의 농경문 청동기 등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농경생활과 소도의 풍속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대덕구 지역에서도 인접지역인 괴정동 지역과 마찬가지로 삼한시대에는 농경생활을 하였을 것이다.

삼한시대를 지나면서 한강유역에서는 마한의 54개국 가운데 하나인 백제가 성장하여 백제국으로 발전하였다. 백제국은 한강유역을 배경으로 성장하여 제8대 고이왕(234∼286)때에는 16관등과 6좌평의 명칭과 업무분장을 이루고, 공복제을 실시하는 등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 그후 근초고왕(346∼375)때에는 세력을 더욱 확장하여 전라도 남해안에까지 확대되었다. 이 때에 대전지역이 백제의 영역에 귀속된 것으로 보인다.  

백제시대에 회덕이 역사상에 등장하는 것은 백제가 서울을 웅진으로 옮긴 이후부터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사기} [잡지] 제5지리에는 "비풍군(比豊郡)은 본래 백제(百濟)의 우술군(雨述郡)으로 경덕왕이 개명하였는데 지금의 회덕군(懷德郡)이다." 라 하여 회덕군이 백제시대에는 우술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술군은 {고려사} 권56, 지(志) 10, 양광도 공주목조에 의하면 우술군을 "일운오천"이라 하여 오천이라 하기도 하였음 알 수 있다. 즉 대덕구 지역은 백제시대 우술군 혹은 오천이라는 행정구역명을 가진 지역이었다.

백제가 고구려의 압박으로 한강유역에서 웅진(공주)으로 천도후 백제의 동성왕(479∼501)은ancient2-2.jpg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신라와는 결혼동맹을 맺어 동맹체제를 강화하여 국력을 신장시켰다. 이에 신장된 국력을 배경으로 보다 넓은 벌판이었던 사비(부여)로 무녕왕을 이은 성왕(523∼554)이 천도를 하였다. 성왕은 천도 후 국호를 남부여 라하고, 신라의 진흥왕과 더불어 고구려에 빼앗겼던 한강유역을 회복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진흥왕은 백제가 회복한 남북한산성을 탈취하여 자국의 주와 현으로 삼아 신주(新州)라 하였다. 이에 격분한 백제 성왕이 신라의 관산성(옥천부근)을 치다가 전사하였다. 성왕이 전사후 백제와 신라는 동맹관계에서 극심한 대립관계로 변모하였다. 특히 백제 무왕은 신라 서쪽 변경에 있던 모산성 등 많은 성을 함락하여 신라를 위기로 몰아 넣었다. 무왕을 이어 즉위한 의자왕도 신라의 대야성 등 40여성을 함락시키고 고구려와 공동으로 당항성(남양)을 처서 신라와 당나라와의 통로를 차단하고자 하였다. 이에 신라는 당나라와 긴밀한 국제관계를 통해 백제에 대항하고자 나·당 연합군을 편성하여 백제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백제의 의자왕은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단결된 힘으로 효과적으로 대적하지 못하고 660년 7월에 패망의 운명을 맞게 되었다.

ancient2-3.jpg백제와 신라가 대립하면서 대덕구 지역은 지정학적 위치로 인하여 신라와 대립의 전초기지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이는 대덕구 일대가 신라에서 보은→옥천→대전→공주에 이르는 소위 웅진도의 교통로 상에 위치하여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백제에서는 신라의 침공에 대비하여 대덕구 일대에 계족산성(대덕구 장동)·이현동산성(대덕구 이현동)·장동산성(대덕구 장동)· 성치산성(대덕구 부수동)·질현성(대덕구 비래동)·연축동산성(일명 우술성 : 대덕구 읍내동) 등의 산성을 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blank.gif백제가 나·당 연합군 침공으로 붕괴된 후에 백제의 유민들은 신라에 대항하여 부흥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백제 부흥운동에 있어서도 대덕구 지역은 웅진도에 해당하는 곳에 많은 산성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어서 부흥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특히 대덕구의 계족산성(옹산성)과 우술성(연축동산성)을 중심으로 백제부흥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었다. 그러나 신라의 품일장군이 이끄는 공격으로 계족산성과 우술성이 함락되면서 백제부흥운동은 점차 위축되어 마침내 부흥군의 왕도인 주유성이 함락됨으로써 끝을 맺게 되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내외의 지배체제를 정비하는 한편 민족융합정책을 취하였다. 그래서 백제와 고구려의 지배층을 신라의 귀족으로 편입을 하는 한편으로 지방행정구역의 개편을 단행하였다. 특히 경덕왕 16년(757)에는 주·군·현의 일대 개혁하여 전국의 군·현을 120개 군, 305개 현으로 개편하고 읍호도 개칭하였다. 이때에 대덕구 지역도 {삼국사기} [잡지] 제5 지리에 의하면 "비풍군은 본래 백제의 우술군으로 경덕왕이 개명하였는데 지금의 회덕군으로 영현(領縣) 둘이다. 유성현은 본 백제의 노사지현을 경덕왕이 개명하였는데 지금도 이에 따른다. 적오현은 백제의 소비포현으로 경덕왕이 개명하였는데 지금의 덕진현이다." > 라 하여 경덕왕이 백제시대의 우술군을 비풍군으로 읍호를 바꾸었고, 비풍군의 영현으로 유성현과 적오현을 그 밑에 두었다. 이처럼 지금의 회덕지역에 있었던 비풍군이 유성구 지역에 있었던 유성현과 적오현을 속현으로 거느린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현재의 대덕구 지역이 이 지역의 중심이 되는 행정구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통일이후 번영을 누리던 신라는 36대 혜공왕 대에 이르면 왕권이 약해지고 귀족들의 세력이 팽창하여 왕위계승을 두고 서로 다투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의 하나가 김헌창의 난이다. 김헌창은 원성왕계이었던 김주원의 아들로 공주도독으로 있었다. 그런데 부친인 김주원이 왕위계승에서 탈락하자 헌덕왕 14년(822년)에 공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무진주·청주·금관경 등을 장악하고, 국호를 장안국(長安國),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하였으나 패전하여 자살하였다. 그런데 김헌창이 공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한때 청주를 점령하였던 것으로 보아 공주와 청주사이의 교통로 상에 위치하였던 대덕구 지역도 난에 휩싸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후기대 이르면 고대사회의 폐쇠성에 따른 모순이 노정되어, 귀족들의 반발로 인한 왕권의 약화와 그에 따른 잦은 왕위의 교체는 왕실의 권위를 떨어뜨리게 되었고, 골품제의 모순에 따른 6두 품들의 도전 등은 신라사회의 해체를 가속화하였다. 그리고 가혹한 수탈에 대항하여 피지배층이 광범위하게 저항하여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빈발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으로 중앙통제력의 약화를 가져와 각 지역에서는 분리 독립화 경향이 심화되어 결국 후삼국이 정립하게 되었다. 이 때 지금의 대덕구 지역은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 지역에 포함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