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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대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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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19-03-18 17:06 조회2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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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yo.jpg태조 왕건은 후삼국의 사회의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왕조를 건국하였다. 이는 진골중심의 신라사회가 고대적 성격의 폐쇠적인 사회라면 새로운 지방세력인 호족이 성장하여 건국한 고려는 중세적 성격의 국가라고 할 수 있다. 건국 후 왕건은 혼인정책과 사성정책·기인제도·사심관제도 등을 통하여 민족융합정책을 취하는 한편으로 중앙집권화 정책을 취하였다. 고려왕조의 집권화 정책은 성종 대에 이르러 국가기반의 확립과 함께 성공하였다. 특히 성종은 유신(儒臣)인 최승로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삼고, 당제(唐制)를 채택하여 내외의 정치제도를 정비하여 중앙집권체제를 확립케 하는데 기여하였다.

고려는 태조 23년에 주·부·군·현을 개명하였다. 그러나 지방행정은 대개 그 지방의 향리를 통하여 자치적으로 행하다가 성종 때에 이르러 주현관을 파견하는 한편 군·현의 읍호를 개정하였다. 그리고 전국을 10도로 나누고 12주에 각각의 절도사를 두었는데, 10도가 소관 하는 군·현은 500여 개나 되었다. 그러나 외관이 파견된 주현이 130개인데 반하여 외관이 없이 주현에 예속된 속현은 373개나 되었다. 당시 지금의 대덕구 지역은 회덕으로 10도 중 하남도( 충남지역)에 속하는 11주 34개 현의 하나이었다. 그 뒤 현종 초년에 12주 절도사를 폐하고 5도호·75도에 안무사를 두었다가 폐하였다. 현종 9년에는 전국을 5도·양계·4도호·8목·15부·129군·335현·29진의 체제로 개편하였다. 이와 같은 개편에 의하여 지금의 대덕구 지역은 공주에 속하는 4군 8현 가운데 하나로 개편되면서 읍호도 비풍군에서 회덕군으로 개명되었다.

회덕군의 개편사실은 {고려사} 권56 지 권10 지리 1 에 자세하다.
회덕군 : 본래 백제의 우술군(오천이라고도 함)으로 신라 경덕왕이 고쳐 비풍군으로 삼았고 고려 초에 다시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 9년에 내속하였고 명종 2년에 감무를 두었다. 계족산이 있다.
덕진현 : 본래 백제의 소비포현으로 신라 경덕왕이 이름을 적오로 고쳐 비풍군의 영현으로 삼았고 고려가 지금 이름으로 바꿔 내속하였다.
유성현 : 본래 백제의 노사지현으로 신라 경덕왕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비풍군의 영현으로 삼았고 고려에서는 구명을 그대로 내속하였다. 온천이 있다.
위에서와 같이 백제시대의 우술군을 경덕왕이 비풍군으로 하였던 것을 고려초에 회덕으로 개명하였고, 현종 9년에 공주의 속현으로 하였다. 그런데 현종 9년에 회덕군이 공주의 속현이 될 때에 통일신라 때에 비풍군의 속현이었던 덕진현과 유성현이 비풍군에서 독립하여 공주의 속현이 되었다.

고려시대는 주·부·군·현 과는 별도로 향·부곡·소등의 특별 행정구역을 두고 있었다. 이들 향·부곡·소의 주민들은 국학의 입학이나 과거의 응시를 금하는 등 일반 군·현의 주민에 비하여 차별대우를 받았다. 고려시대 회덕지역에 있었던 향·부곡·소를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서봉부곡 : 현 동쪽 11리.  흥인부곡 : 현 동쪽 18리.  침이소 : 현 북쪽 18리 에서처럼 서봉부곡·흥인부곡 등 2개의 부곡과, 침이소(針伊所) 1개가 있었다.  

고려시대의 군사제도는 중앙에는 경군으로 2군 6위로 편성되었고, 지방군은 주현군으로 5도에는 치안과 방비를 담당하였던 보승과 정용, 그리고 노동부대로 일품군을 두었다. 그리고 양계에는 초군·좌군·우군으로 성과 진의 상비군을 삼았다. 대덕구 지역은 양광도의 공주에 속하였는데 당시 공주에는 보승이 326인, 정용이 553, 일품군 527인이었다. 따라서 공주의 속군이었던 회덕군에서도 공주의 보승·정용·일품군 등의 차출이 있었을 것이다.

고려시대의 참역제는 매우 발달되어 역전계통은 전국에 뻗어 있었다. 참역은 정령 및 공보의 전달과 군사적 연락 및 지방파견 관원의 처송과 특수물자의 수송 등을 사명으로 하는 것이었다. 고려시대 참역의 계통은 전국에 걸쳐 역로의 간선이 22도에 참역의 22로에 간선역의 수가 525개소에 달했다.

대덕구는 전공주도에 속하였는데, 전공주도는 삼례(삼례-전주)·양재(여양-여산)·재곡(함열)·채평(금마-익산)·내재(금제)·고원(고부)·거산(태인)·천원(정읍)·소안(임파)·진현(진례-금산)·경천(공주)·평천(연산)·정민(회덕) 등 21역이 이에 속하였는데 정민역이 곧 지금의 유성구 전민동 지역이었으나 당시에는 회덕 지역에 속하였던 곳이다.   

무인집권기에 집권무인들의 수탈 등으로 농민들이 더욱 곤궁하여졌다. 그러자 농민들은 무인 상호간 정권다툼으로 통제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명종·신종대의 30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봉기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 공주지역에서는 명종 6년 정월에 명학소에서 망이·망소이 등이 난을 일으켰다. 이들은 여당을 모아 가지고 산행병마사를 자칭하면서 봉기하여 공주를 함락하는 등 기세를 떨쳤다. 따라서 정부에서는 회유책으로 망이의 향리인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시키고 선유하였다. 그러나 반군은 이에 만족치 않고 재차 봉기하여 예산현을 공략하여 감무를 살해하는 등의 더욱 기세를 올리다가 정부의 무력토벌에 항복하였다. 그후 다음해 2월에 다시 봉기하여 가야사를 침략하고, 3월에는 홍경원(직산)을 불태웠다. 그리고 아주(아산)를 함락하는 등 기세를 떨쳤으나 7월에 이르러서 정부군에게 토벌되었다. 그런데 명학소의 위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유성현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라 하여 지금의 대전 서구 탄방동과 둔산동 일대에 해당된다. {대동지지}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방면을 설치하는데 신라·고려 때의 향·부곡·처의 명칭에 기인한 것이 많다 하여, 탄소가 탄방동으로 개칭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어찌되었던 회덕 인접지역에 망이·망소이 난이 일어나 충청도 일대로 확대되었기에 회덕 지역도 난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 틀림없다.

고려말에 고려를 괴롭히던 외침세력으로는 왜구가 있었다. 이와 같은 왜구의 침략행위는 일찍부터 있어온 것이었지만, 보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충정왕 2년(1350)부터이었다. 고려는 처음에는 왜구문제를 외교적인 노력과 회유, 그리고 토벌정책을 병행하였다. 그러나 외교적 노력이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국방체제를 정비하고 대대적 무력을 쓰는 토벌정책을 택하였다. 이시기에 공주와 연산 그리고 회덕 지역도 왜구에게 침구를 당하였다. 다음의 {고려사} 기사가 그러한 사실을 잘 전하고 있다. 신우 2년 7월에 왜가 부여에 침구하여 공주에 이르거늘 목사 김사혁이 정현에서 싸우다가 패전하매 적이 드디어 공주를 함락시키거늘, 양광도 원수 박인계는 속현인 회덕의 감무 서천부가 구원하러 나가지 않음으로 써 이를 참하였다. 이 때에 연산의 개태사도 도륙되었다.
신우 4년 10월에 왜가 옥주·진동·회덕·청산·임주에 침구하거늘 양광도 원수 한방언이 처서 2급을 참하고 마 10필을 획득하였다.
즉 신우 2년 7월에 공주에 침입한 왜구의 소탕에 회덕 감무인 서천부가 구원하지 않아서 참수를 당하였는데, 이때에 연산의 개태사가 불에 탔다. 신우 4년 10월에는 왜구가 회덕에 침입하였던 것이다.

고려말에 이르면 지배세력인 권문세족에게 도전하는 새로운 사회세력이 출현하였는데 이들이 신흥사대부였다. 신흥사대부는 권문세족의 정치권력의 독점과 부정 부패에 따른 정치·경제·사회적 혼란을 시정하기 위한 개혁정치를 주장하여 권문세족과 대립하게 되었다. 명분론에서 앞서 있던 신진사대부들은 국왕의 개혁정치에 호응하면서 자신들의 입지를 확대하여 나갔다. 그러다가 중국의 원명교체기에 이르면서 요동정벌의 문제가 대두되었고, 신흥무장세력이었던 이성계는 위하도에서 회군하여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게 됨으로써 조선 건국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