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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의대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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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19-04-15 17:19 조회2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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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osun01.jpg조선의 건국과 함께 태종대에 8도 체제로 지방행정체제의 대폭적인 개편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방통치체제도 왕(중앙정부)→감사→수령→면리임으로 이어졌으며, 행정구역도 서울→도→주·부·군·현→면(방·사)→리(동·촌)로 편성되었다. 이와 같은 행정구역은 종적인 상하관계로는 크게 3층을 형성하여 목민관인 수령이 통치하는 군·현(읍=고을)을 중심으로 위로는 상급 행정구역인 8개의 도역으로 편성되어 있고, 아래로는 군·현의 관내에 하부 행정구역인 면 또는 그 밑에 리로 편성되어 있다.

태종대에 8도제는 전국 8도(경기도·충청도·경상도·전라도·황해도·강원도·함길도·평안도)에는 관찰사를 두고 그 밑에는 부·대도호·목·도호부·군·현 등 310여 개의 행정구역을 설치하여, 그 수령으로 각각 부윤·대도호부사·목사·도호부사·군수·현령·현감을 배치하였는데 수령은 중앙에서 파견하는 외관으로 충당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외관이 파견되지 못한 속현이 373개나 되었던 고려시대와는 다른 것이고, 고려적인 향·소·부곡이 소멸되어 직촌화 하면서 면·리 제가 점차 일반화되었다. 그리고 이들 수령은 행정체계상으로는 모두 병렬적으로 직속상관인 감사의 관할 하에 있었으며, 다만 이들 수령이 겸대하는 군사직으로 말미암아 수령간에 상하의 계통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충청도는 태종 13년 도역이 조정된 뒤에는 한말까지 변동이 없었으나 도명은 도를 구성하고 있는 있던 계수관(忠·淸·公·洪州)의 읍격 승강에 따라 충청(忠淸)·공청(公淸)·공홍(公洪)·충홍(忠洪)도 등으로 개칭이 빈번하였다. 충청도의 사방 경계는 동으로는 단양현의 죽령에 이르고, 서로는 태안의 후근이포에 이르며, 남으로는 은진현의 작지에 이르고, 북은 직산의 아주제에 이른다. 동서의 거리는 477리, 남북이 244리이며, 소관 읍 수는 목 4, 군 11, 현령 1, 현감 39읍이었다. 감영은 국초에는 충주에 있었으나 선조 31년(1589)에 공주로 옮겼다.

조선초기 태종 13년의 개편에 따른 충청우도에 속해있었던 33개의 주·부·군·현의 편성은 다음과 같다.
목사(종3품) : 공주·홍주(2)
군수(종4품) : 임천·태안·한산·서천·면천·서산·온양(7)
현감(종6품) : 홍산·평택·정산·청양·은진·회덕·진잠·연산·니산(노성)·부여·석성·비인·감포·결성·보령·해미·당진·신창·예산·전의·연기·아산·대흥·덕산(24)
위에서처럼 지금의 대덕구 지역인 회덕현은 공주·홍주목 등과 함께 충청우도에 속해 있었던 24개 현 가운데 하나로 종6품의 현감이 다스리는 관아였다. 회덕현의 지리적 위치로 사방의 경계는 동쪽으로 청주에 이르기 14리, 서쪽으로 공주에 이르기 7리, 남쪽으로 진산에 이르기 22리, 북쪽으로 문의에 이르기 24리이었다.

조선초기의 지방군제는 세조 3년에 성립한 진관 체제이었는데, 이것이 뒤에 약간의 수정이 가해진 뒤 {경국대전}에 법적으로 규정되었다. 진관 체제하에서는 각 위의 지휘관을 수령이 겸대하도록 되어있어 회덕현감은 병마절제도 위를 겸대하였다.

조선초기 종6품 현감이 다스리는 현의 기본구조는 {경국대전}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현감(종6품) 1원, 좌수 1원, 별감 2원, 읍사는 현사이고, 교관은 훈도이고, 향교유학생도 30원, 관둔전결수 12결, 늠전은 아녹전이 40결이고, 공수전이 15결, 외아전은 서원이 18원이며 일수(日守)가 28원, 관노비 수는 100명, 향교노비 수는 10명 등이다. blank.gif그러나 이러한 정수는 어디까지나 법제상 정해진 것이고 실제는 읍세의 융성과 쇠잔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실제로 회덕현의 경우에도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현감·훈도 각 1인으로 되어 있다. {여지도서} 회덕현 관직 조에서는 현감은 음직으로 종6품, 좌수·별감이 각각 1인, 군관 5인, 아전 18인, 지인 9인, 사령 14명, 관노 12명, 관비 17명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차이는 {동국여지승람}의 내용이 틀린 것이 아니라 {여지도서}의 내용이 보다 구체적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관원 외에도 회덕현에는 {경국대전} [공전]에 의하면 외공장으로 유구장(油具匠) 1원, 야장(冶匠) 1원, 시인(矢人) 1원, 지장(紙匠) 2원, 석장(席匠) 1원, 목장(木匠) 1원, 피장(皮匠) 1원, 칠장(漆匠) 1원씩을 두었다.

조선시대 외방의 도로는 그 멀고 가까움에 의하여 대로·중로·소로로 나뉘었는데, 이와 같은 등급은 한양에서의 거리에 따라 구분된 것이었다. 따라서 회덕에 연한 도로는 대로로 연결되는 도로는 없고, 다만 소로로서 중로에 연결되는 도로만이 있었다. 지금 대전과 연결될 수 있는 각종 도로는 다음과 같다. · 서울→소사→공주→삼레→고성간 간선도로
· 서울→소사→성환→차령→공주→삼례→고성
· 서울→차곡역→동래→부산간 간선도로 및 지선도로
· 서울→한강→판교침→용인→직곡→좌찬→진촌-+-→광암→충주→조령→차곡역→대구-+동래
· 서울→한강→판교침→용인→직곡→좌찬→진촌 └-→진천→청주

· 원치대로(遠峙大路) : 현의 동쪽 20리. 옥천으로 통하는 길.
· 형각진대로(荊角津大路) : 현의 북쪽 30리. 문의로 통하는 길.
· 질치소로(迭峙小路) : 현의 서남쪽 10리. 공주로 통하는 길.
· 신탄진소로(新灘津小路) : 현의 서북쪽 20리. 문의로 통하는 길.
· 양정자소로(凉亭子小路) : 현의 남쪽 5리. 공주로 통하는 길.   blank.gif이와 같은 전국의 주요 도로에는 대략 30리마다 역을 설치하고, 역에는 마필과 역원을 두어 공문을 전달하거나 공무 여행자에게 마필과 숙식을 제공하고, 관물의 수송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회덕현에는 정민역(현의 서쪽 10리에 위치, 지금의 유성구 전민동)이 설치되어 있었다. 정민역은 청주의 율봉도 관할에 속하여 청주-문의-회덕-옥천을 잇는 지방 소역 가운데 하나이었다. 정민역에는 소역으로서 대마 1필, 역마 4필, 복마 3필과 역리 31인이 있었으나 역노비는 없었다.

역과 더불어 공무 여행자의 숙식을 위해 객사와 원(院)이 준비되어 있었다. 객사는 각 고을에서 빈객을 접대하는 곳이었고, 원은 역과 같은 장소에 설치된 경우가 많아서 역과 원을 합하여 역원이라 하였다. 회덕에 설치된 원은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 미륵원 : 일명 굴파원. 일도면.(지금의 동구 마산동 소재)
· 덕창원 : 서면(지금의 유성구 문지동 소재)
· 총술원 : 북면(지금의 대덕구 읍내동 소재)
· 형지원 : 일도면(지금의 대덕구 부수동 소재).
· 여아원 : 남면(미상) blank.gif이중에서 미륵원이 가장 유명하다. 미륵원은 고려시대에서부터 있어온 것이었으나 일시 중단되었다가 조선초 회덕황씨 황연기에 의해서 다시 시작된 일종의 무료여관이었다. 이에 관하여 『동국여지승람} '회덕조'에는 목은 이색이 쓴 미륵원 남루기와 하륜이 쓴 발문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회덕에는 역원이외도 이원진(속칭 형각진이라 하며, 나룻배가 있다.)이라는 나루가 있었다.

조선시대 통신수단의 하나가 봉수이었다. 봉수란 밤에 불로서 알리는 연봉과 낮에 연기로서 알리는 번수를 합친 말이다. 봉수는 연락을 그 기능으로 하기 때문에 각 봉수대는 이웃 봉수대와 연락망을 이루고 있었다. 봉수의 연락망은 기능의 중요성에 비례하여 간선과 지선으로 나뉘었다. 간선은 변경지방에서 중앙으로 직접 통하였기 때문에 직봉(直烽)이라 하였고, 그 사이에 보조 선으로 지선이 있었는데 이를 간봉(間烽)이라 하였다. 봉수법으로는 평상시 아무 일이 없으면 1거, 육지에서 적병이 국경 쪽으로 움직이면 2거, 국경에 접근하면 3거, 국경을 침범하면 4거, 우리 군대와 접전하면 5거로 하였다. 바다에서는 적선이 나타나면 2거, 해안 가까이 오면 3거, 우리 병선과 접전하면 4거, 적이 육지에 올라오면 5거이었다.

조선에는 모두 5개간선 봉수망에 직봉과 간봉을 합하여 670개의 봉수가 있었다. 회덕에는 계족산에 봉수가 하나 있었다. 계족산 봉수는 제2거로 동래에서 서울간에 있던 봉수 중 제9간 봉의 하나이었다. 기점은 초기 금산(남해)에서 시작하여 진주-사천-진주-단성-삼가-협천-거창-지예-금산-황간-영동지역의 봉수를 거처 월이산(옥천)-환산(옥천)-계족산(회덕)-소이산(문의)-거칠대산(청주)-소흘산(진천)-충주 망이성(직봉)으로 연결하는 중간 역할을 하였다.   

기타 조선초기 회덕의 실정을 {세종실록지리지}의 내용을 통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회덕의 호수는 3백 호에 인구는 1,266명이었고, 군정은 시위군이 7명이요, 수호군이 4명이요, 선군(船軍)이 149명이다. 그리고 조선초기 회덕의 세거성씨는 토성은 4이었는데 황·임·이·방이요, 망성(亡姓)이 1이니, 곽이요, 정민역의 속성이 2이니, 배·김이다. 회덕의 경작지는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이었으며, 간전이 2,688결이었다(논이 5분의 2가 된다). 토의(土宜)는 오곡과 모과이다. 토공(土貢)은 느타리·싸리버섯·칠·잡깃·밀·대추·여우가죽·삵괭이가죽·잘(산달피)·지초·종이요, 약재는 오배자이요, 토산은 석철이다(현의 북쪽 20리 직동에서 나는데, 하품이다). 이밖에 회덕의 월경처(越境處)는 유성의 동촌 낭산리가 현의 남면에 들어와 있었다.

조선전기에 회덕에 세워진 교육기관으로는 회덕향교와 숭현서원이 있다. 숭현서원은 김정·정광필·송인수를 배향하여 삼현사(三賢祠)라 하였었으나 광해군 1년(1609)에 사액을 받은 후에는 숭현서원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