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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회의대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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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19-04-15 17:35 조회1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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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cent.jpg19세기에 이르면 안으로는 세도정치의 사회경제적 모순이 심화되고, 밖으로는 제국구주의 도전이 조선사회를 위기로 몰아 넣었다. 이런 시기에 철종이 죽고 고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게 되자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집권하게 되었다. 대원군은 집권 후 각종 내정을 개혁을 하는 한편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양반지주의 아성이었던 서원을 국가재정을 좀먹는다는 이유로 전국에 47개소만 남기고 철폐하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대덕구 회덕 지역에 있었던 숭현서원·정절서원·종회사·용호사·미호서원 등 모두가 훼철되었다. 숭현서원은 건립 년대는 잘 알 수 없지만 배향 인물로 보아 16세기 말경에 건립되었다가 1609년(광해 1)에 사액을 받은 서원이다. 처음에는 정광필·김정·송인수 등이 배향되었다가 김장생·송준길·송시열 등이 추향되었고, 이시직과 송시영을 별묘에 배향한 서원이었나 1871년 대원군의 서원정리 때 훼철되었다. 정절서원은 1684년(숙종 10)에 회덕 흥농(동구 가양동)에 건립되어 송유·박팽년·송갑조·김경여·송상민·송국택 등을 배향하였다가 1871년 훼철되었다. 종회사는 1697년(숙종 23)에 회덕 흥농에 건립되어 주희·송시열을 배향한 서원이었으나 서원철폐 시 훼철되었다. 용호사도 1697년(숙종 23)에 회덕 용호동에 건립되어 강학년·강세구 등을 배향한 서원이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훼철되었다. 미호서원은 1709(숙종 35) 회덕 미호동에 건립되어 송규렴을 독향하였으나 서원정리 때 훼철되었다.

이시기 회덕을 중심으로 한 대덕지역은 위정척사론에 입각한 반개화적 분위기가 팽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회덕지역에는 송달수·송근수·송병선·송병순 등 위정척사론에 철저한 유학자들이 거주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를 바탕으로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있게되자 문석봉의 유성봉기를 가능케 하였다 할 수 있다. 이는 회덕지역의 척사론적 분위를 보여준 것이다.

동학농민전쟁은 봉건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반봉건 민중운동인 동시에 반제국주의 운동이었다. 나라에서는 동학을 위험시하여 철종 14년(1864)에 혹세무민의 죄로 최재우를 체포하여 대구감영에 가두었다가 이듬해 고종 1년(1865)에 사형에 처하였다. 그러자 2대 교주 최시형은 교조신원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교조신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최시형은 제폭구민과 척양벌왜를 표방하면서 보은 취회를 감행하였다.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고종 29년(1892)에 고부민란이 일어나 전주·충청도 일대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그러나 전봉준은 전주에서 전라감사 김학진과 타협하면서 동학군을 해산하였다.

그후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여 동학군의 2차 봉기가 일어나자 충청도 공주부 여러 지역에서도 이에 호응하였는데 회덕·진잠·청산·보은·옥천·문의 등 대전을 둘러싼 지역이 중심이 되었다. 동학농민 전쟁시기에 회덕지역에서는 동학군이 회덕 관아를 공격하였다. 이때 참여한 동학군은 회덕·진잠·옥천 등지에서 집결한 부대로 보인다.

한말 항일 의병운동은 을미사변 직후에서부터 본격화되었으며 대전의 유성·회덕지역이 그 시초를 이룬 지역이다. 문석봉이 1895년 8월에 명성황후의 시해소식을 듣고 복수를 위하여 1895년 9월 18일 의병을 일으켰는데 이에 회덕의 사족이었던 송도순이 군향으로 참석하였고, 전 좌의정 송근수 역시 신응조와 함께 문석봉의 의병항쟁을 지원해 주었다. 문석봉 의병은 유성에서 1천명의 부대를 편성한 후에 회덕현을 급습하여 무기를 탈취한 후 공주로 진격하다가 관군에 패했다. 이처럼 대덕구 지역에서는 의병운동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회덕에 거주하였던 사족인 송병선·송병순 형제가 자결 순국하는 등 민족운동이 활발한 지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