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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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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19-04-15 15:24 조회6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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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_arrow.gif강 혼

 

* 자(字) : 士浩(사호)
* 호(號) : 木溪(목계)
* 년    대 : 1464년(세조10) - 1519년(중종14)
* 관    직 :좌승지, 대제학, 공조판서, 한성부판윤, 판중추부사, 우찬성
* 거주지 : 회덕 잔골(자운리, 석봉동)
* 문    집 : 목계집
* 묘    소 : 대전광역시 대덕구 석봉동
강혼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호는 木溪(목계), 본관은 진주이다. 아버지는 강인범이며, 김종직의 문인이다. 현존하는 <회덕향안>에 강혼은 '유학'과 '학생'으로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출사하기 전에 이미 회덕의 향원으로 인정받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강혼은 20세가 되던 해인 1484년(성종14) 생원시에 장원하고, 23세 때(1486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호당에 들어가 사가 독서함으로써 문명을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그는 김종직의 문인으로 붕당을 만들어 정치를 비방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형벌을 당하게 되었다.

강혼은 무오사화에서 사림파의 일원이라 하여 이렇게 심한 고역을 치르기는 하였으나, 얼마 가지 아니해서 곧 방면될 수 있었다. 그는 특히 시문에서 뛰어나서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고, 도승지로서 왕을 가까이 보필하였는데, 당시에 "文名이 김일손 다음이다" 라는 칭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강혼은 명리를 지나치게 탐내고, 또 연산군의 애희에 대한 관인애해와 제문을 잘 써서 연산군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하여 이후 사림의 질타를 받았다. 1506년(연산군12) 중종반정 세력이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영의정 유순의 주선으로 반정 세력에 나아가 사죄한 후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 3등으로 진천군에 봉해졌다. 그후 그는 좌승지를 거쳐, 대제학·공조판서를 거쳐 1512년(중종7) 한성부판윤이 되었고, 이어 숭록대부에 올라 판중추부사·우찬성 등을 역임하였다. 반정 후 강혼은 이윤으로부터 폐조의 행신이라는 탄핵을 받기도 하였으나, 세조 정권에 의해 파헤쳐져 물가에 매장된 소능(문종왕비 권씨)의 회복을 앞장서서 주장하여 현릉에 합장케 하는 등 사림 정신에 부합되는 주목할 만한 행동을 이루었다. 저서는 『목계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