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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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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19-04-16 10:26 조회4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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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_arrow.gif 송준길(宋浚吉)

 

* () : 명보(明甫)

* () : 동춘당(同春堂)

* 년 대 : 1606(선조39) - 1672(현종13)

* 관 직 : 집의, 찬선, 이조참판, 성균관 제주, 병조판서, 대사헌, 이조판서, 우참찬, 좌참찬

* 증 직 : 영의정

* 거 주 지 : 회덕 송촌

* 유 적 : 동춘당, 동춘고택(송촌동), 옥류각, 초연물외 암각(비래동)

* 저 서 : 동춘당집, 어록해

* 묘 소 : 대전광역시 서구 원정동

송준길은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로 호는 동춘당(同春堂), 본관은 은진이다. 영천군수 송이창의 아들이다. 서울 정릉의 외가인 김은휘의 집(서울 정동 구 대법원 청사자리)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일찍이 사계 김장생·신독재 김집이 태어난 곳이었으므로 송준길의 출생까지를 합쳐 사람들이 이곳을 삼현대(三賢臺)라 불렀다. 문묘에 배향된 삼현이 태어난 곳이라는 뜻이다.

 

그는 어려서 율곡 이이를 사숙하였고, 청년기에 송시열·이유태 등과 함께 김장생(동춘의 표종숙)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인조반정 직후인 1624(인조2) 사마 양시에 합격하였고, 1630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세마에 제수되었다. 이후 내시교관·동몽교관·시직·대군사부·예안현감·형조좌랑·지평·한성부판관 등에 제수되었으나 대부분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이 기간 중에 1633년 동몽교관으로 잠시 출사하였으나, 장인 우복 정경세의 죽음이 있자 이를 빌미로 사임하였고, 곧이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출사할 명분이 없다 하여 향리에서 공부에 전념하였다.

 

1649년 인조가 죽고 효종(봉림대군)이 즉위하였다. 효종은 청이 조선을 무력으로 굴복시키고 만행을 자행하는 데 대해 대군 시절부터 강한 복수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청에 인질로 끌려가서 8년 동안이나 볼모생활을 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또 자신이 그곳의 지리·정세 등에 밝았으므로, 즉위와 함께 자신의 북벌 의지를 실천에 옮기고자 하였다. 효종은 먼저 조정에서 친정세력을 배제하고 재야의 참신하고 절의 있는 인재들을 등용하고자 하여 산림을 대거 중용하였으니, 김상헌·김집을 필두로 한 이른바 산당의 출현은 바로 북벌 의지의 산물이었다.

 

효종이 즉위한지 한 달이 되는 68, 송준길(,지평)은 김집(,승지송시열(,지평이유태(,사부권시(,자의) 등 호서의 대표적 유자관인들과 함께 왕의 소명을 받고 서로 뒤를 이어 조정에 들어왔다. 효종은 다음 날 처음으로 정사를 보았는데 이때 이들의 대표 격인 김집을 발탁하여 예조참판에 제수하였다. 이조가 예부의 관헌은 반드시 문신 중에서 등용해야 한다고 하여 반대를 하였으나, 왕은 "옛것을 상고하고 글을 읽은 사람을 부른 것은 장차 등용하기 위해서이니, 상규에 얽매일 것이 아니다."라 하여 그의 산림 중용의 방침을 확고히 하였다. 그러나 김집은 여론을 의식하여 이를 극구 사양하였으므로 효종은 우선 그를 예조참판에 제수하였다가, 대사헌을 거쳐 그 해 11월 이조판서에 기용하게 된다. 산당의 영수인 김집에 대한 이러한 예우는 곧 그 당여인 송준길·송시열의 지위 변화에도 밀접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송준길은 진선·장령 등을 거쳐 집의(3)에 올랐는데, 이때 그는 공신계로서 비난이 높았던 김자점을 탄핵하여 이들을 축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김자점이 효종의 반청정책을 밀고하여 청의 조사 사절이 줄을 이어 내려오는 등 사태가 급변하게 되자, 송준길은 산당계의 다른 인사들과 함께 벼슬을 버리고 낙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송준길은 집의·이조참의·찬선 등으로 여러 번 부름을 받았으나 계속 사퇴하였고, 1658(효종9) 7월 조정에 다시 들어가 찬선·대사헌·이조참판을 차례로 역임하고, 그해 12월에는 성균관의 좨주(3)를 겸하게 되었다. 16593월에 병조판서에 제수된 후 대사헌, 우참찬 등을 맡아 이조판서를 맡고 있던 송시열과 함께 국정을 이끌면서 북벌계획에 깊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북벌을 당연히 국시로 삼아야 하되 바로 북벌시행은 불가하며, 민생의 안정을 이룬 후에 대지를 펼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민생을 살리고 국정을 안정시키는 일에 부심하였다. 그러나 효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국가의 북벌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때 조대비의 복상문제로 예송이 발발하자 송시열과 함께 기년제를 주장하여 뜻을 관철시켰다. 이 해에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고, 이후 우참찬·대사헌·좌참찬 등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기년제의 잘못을 규탄하는 남인계의 계속된 상소로 사퇴하였다. 1665(현종6) 원자의 보양에 대한 건의를 하여 첫 번째 보양관이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1670년 세자의 관례가 있어 조정에 나갔으나 잠시 머물다가 다시 낙향하였다. 이후 2년 동안 회덕 향리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672(현종13) 67세로 타계하였다.

 

1673년 송준길은 현종에 의해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에 인선왕후(효종비)의 죽음을 계기로 조대비의 복상문제가 다시 대두되었고(2차 예송), 이번에는 남인의 기년설이 서인의 대공설을 누르고 승리하게 됨에 따라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따라서 1675(숙종1) 송준길은 허적·윤휴·허목 등의 공격을 받아 삭탈관작 당하였으나,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함으로써 관작이 다시 복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