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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관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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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19-04-16 10:53 조회6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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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_arrow.gif 조선시대의 관직[1]

◎ 관직 관련 상식 - 01

 

문음(門蔭)과 천거(薦擧)

 

문음(門蔭)은 글자 그대로 門閥(문벌)과 蔭德(음덕)으로 벼슬하는 것인데, 높은 관직자나 명신·공신·유현·전망자·청백리 등의 자손들이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직에 임용하는 제도를 말한다. 또 천거(薦擧)는 사림 중에서 학행이 뛰어나고 덕망이 높은 재야 인사를 현직 고관이나 지방관의 추천으로 벼슬에 발탁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 문음과 천거를 아울러서 음사·음직 또는 남행 이라고 일컬었다.

 

文班(문반)의 내·외직

 

문반의 경우, 벼슬자리는 크게 내직과 외직으로 구분된다. 내직은 중앙 각 관아의 벼슬인 경관직을 말하고, 외직은 관찰사·부윤·목사·군수·현령·판관·현감·찰방 등 지방관직을 말한다. 내직 중에서도 옥당과 대간 벼슬을 으뜸으로 여겼는데, 옥당은 홍문관의 별칭으로서 부제학이하 응교·교리·부교리·수찬 등을 말하고, 대간은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직으로서 사헌부의 대사헌·집의·장령·지평·감찰과 사간원의 대사간·사간·헌·정언 등을 가리킨다. 홍문관·사헌부·사간원을 삼사라 했는데, 삼사의 관원은 학식과 인망이 두터운 사람으로 임명하는 것이 통례였으므로 삼사의 직위는 흔히 청요직이라 하여 명예스럽게 여겼다. 따라서 삼사는 사림 세력의 온상이 되기가 일쑤여서 조정의 훈신들과 자주 압력을 일으킴으로써 당쟁을 격화시키는 한 원인을 이루는 등, 역기능을 빚기도 했다.

 

湖 當(호당)

 

족보를 보면 높은 벼슬을 지낸 문신 중에는 「호당」을 거친 이가 많이 눈에 뜨인다. 호당이란 독서당의 별칭으로서 세종 때 젊고 유능한 문신을 뽑아 이들에게 은가를 주어 독서(공부)에 전념하게 한데서 비롯된 제도인데, 이를 「사가독서」라고 하여 문신의 명예로 여겼으며 출세 길도 빨랐다.

 

文 衡(문형)

 

문과를 거친 문신이라도 반드시 호당 출신만이 문형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문형이란 대제학의 별칭인데, 문형의 칭호를 얻으려면 홍문관 대제학과 예문관 대제학 그리고 성균관 의 대사성 또는 지성균관사를 겸직해야만 했다. 문형은 이들 삼관의 최고 책임자로서 관학계를 공식거로는 삼공(영의정·좌의정·우의정)이나 육경(육조판서)보다 위로 쳤다. 역사상 여러 벼슬에서 최연소 기록을 세운 이는 한음 이덕형인데, 그는 20세에 문과에 올라 23세에 호당에 들었고 31세에 문형이 되었으며 38세에 우의정이 되어, 42세에 영의정에 이르렀다.

 

銓 曹(전조)

 

요즈음에도 행정부의 각 부에 서열이 있듯이, 육조 중에서도 문관의 인사 전형을 맡은 이조와 무관의 인사 전형을 맡은 병조를 전조라 하여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이조와 병조의 관원은 상피라 하여 친척이나 인척되는 사람이 함께 전조에 벼슬하는 것을 막았다. 이를테면 명종 때에 신광한이 병조참판이 되고 송기수가 이조참판이 되었는데, 서로 혼인관계가 있다 하여 신광한을 신영으로 교체했다. 또 숙종 때에는 홍명하가 이조판서로 있을 때 홍중보가 병조판서가 되었는데, 홍중보는 홍명하의 형 홍명구의 아들이므로 대간이 이의를 제기하여 병조판서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었다. 또 정승은 병조판서를 겸직할 수 없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박원종·유성용·박순·김석위 등이 예외로 겸직했다. 병조는 군정의 모든 일을 맡아 상당히 권한이 컸었으나, 명종 때 비변사가 상설되면서 임란 후로는 비변사가 군정을 관장하여 병조의 권한은 약화되었다.

 

이조정랑·좌랑의 권한

 

이조에서도 특히 정랑(정5품)과 좌랑(정6품)이 인사 행정의 실무 기안자로서 권한이 컸는데, 이들을 전랑이라 일컬었다. 전랑은 삼사 관원 중에서 명망이 특출한 사람으로 임명했는데, 이들의 임면은 이조판서도 간여하지 못했고 전랑 자신이 후임자를 추천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전랑을 지낸 사람은 특별한 과오가 없는 한 대체로 재상에까지 오를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마련이었다. 선조 때 심재겸과 김효원이 전랑직을 둘러싸고 다툰 것이 동인·서인의 분당을 가져온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계·사·직과 행수법

 

관직의 정식 명칭은 階(계)·司(사)·職(직)의 순서로 되어 있는데, 이를테면 영의정일 경우 대광보국숭록대부(계) 의정부(사) 영의정(직)이 된다. 계는 품계, 사는 소속 관청이며 직은 직위를 가리킨다. 그런데 「행수법」이라는 것이 있어서, 품계가 높으면서 관직이 낮은 경우 (계고직비)에는 行(행)이라 하고, 반대로 품계가 낮은데 관직이 높을 경우(계비직고)에는 守(수)라 하여, 소속 관청의 명칭 앞에 '行' 또는 '守'자를 붙이게 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종1품인 숭정대부의 품계를 가진 사람이 정2품 직인 이조판서가 되면 숭정대부 행 이조판서라 하고, 반대로 종2품인 가선대부의 품계를 가진 사람이 정2품 직인 대제학이 되면 가선대부 수 홍문관 대제학이라 했다. 고려시대의 인물에 수 태보니, 수 사공이니 하는 관직이 많은 것도 모두 같은 예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중앙관청의 계장급인 사무관이 서기관의 보직인 과장자리에 임명되면 守(수), 그 반대의 경우면 行(행)이 되는 셈이다. 또 고려말∼조선초의 인물에 검교 문하시중이니 검교 정승이니 하여 檢校(검교)란 용어가 많이 눈에 띄는데 이는 실제의 행직은 보통실제의 현직을 말한다.

 

耆 社(기사, 기로소)

 

기사(耆社)라는 것은 기로소(耆老所)의 별칭으로서, 태조 때부터 노신들을 예우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였다. 기사에 들려면 정2품 이상의 실직을 지낸 사람으로서 나이가 70세 이상이어야 했으며, 임금도 늙으면 여기에 참가하여 이름을 올렸다. 그러므로 기사는 임금과 신하가 동참하는 것이라 하여 관청의 서열로도 으뜸으로 쳤으며, 조정에서는 매년 삼월 삼진날과 구월 중양절에 잔치를 베풀었는데 이를 기노연 또는 노영회라 했다. 따라서 기사에 드는 것을 최고의 영예로 여겼는데, 사천목씨의 목첨·목서흠·목래선의 3대와 한산이씨의 아계·석루·과암 3대가 각각 기사에 연입하여 이 방면에 기록을 세웠다.

기사에 들려면 반드시 문과를 거친 문신이어야 했으며, 무관이나 음관은 들 수 없었다. 미수 허목 같은 이는 정승을 지내고 나이 82세나 되고서도 문과를 거치지 않았다 하여 기사에들지 못하다가 신하들의 주청으로 뒤늦게 기사에 들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는 문과를 거치지 않은 음관이나 무관 또는 나이 70세가 되지 않은 사람도 기사에 들었는데, 권희·김사형·이거이·이무·조준·최윤덕·최항 등이 이에 해당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