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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평기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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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19-04-16 17:14 조회13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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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_arrow.gif민평기 가옥(閔平基 家屋)
  * 분   류 : 향토유적
* 소재지 : 대전광역시 대덕구 삼정동 258
* 수   량 : 2동(행랑채, 안채)
* 재   료 : 목조
* 연   대 : 조선 말기
* 개   요 : 이 가옥은 조선조 말 고종황제의  승지를 지낸  민후식이 이곳에 거처를 마련하면서 처음 지은 것이다. 여흥 민씨 삼랑공파의 19대 장손의 가옥으로 구한말 일제의 강점으로 혼란스러울 때 여주에서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처음 이전한 곳은 현재 자리잡고 있는 이 집터가 아니라 대청댐으로 수몰된 아래 '삼정골'에 있었다. 원래 자리잡았던 곳에는 여흥 민씨들이 약 22가구가 함께 모여 살고 있었으나 1979년 댐 건설로 인해 모두 외지로 이전하고 이 집만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이 가옥 앞으로 2차선 차도가 지나가고 도로 건너편으로 대청댐 호수가 넓게 펼쳐져 있다. 뒤로는 구릉이 형성되어 있으며 건물은 동향을 하고 있다.

024.jpgblank.gif배치는 안마당을 가운데 두고 전면에 '一'자형 행랑채를, 후면에 'ㄱ'자형 안채를 배치하였다. 동측에는 '一'자 모양의 벽돌조 건물로 안마당을 막아 두었다. 원래 벽돌건물 자리에는 곳간으로 사용하던 목조건축물이 있었으나 1979년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가게로 사용할 수 있도록 벽돌조로 바꾸었다. 현재 가게로 사용하지 않고 창고로 쓰고 있다. 안마당에는 석류나무와 파초 등 여러 가지 나무를 심어 두었다.

행랑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 반으로 되어 있으며 가운데 대문을 두고 좌우에 방과 창고를 두었다. 안마당 쪽으로 반칸을 내달아 퇴칸을 설치하여 한쪽은 마루를 깔고, 다른 한쪽은 흙바닥으로 처리하였다. 행랑채를 앞에서 보면 대문을 중심으로 좌우가 다르다. 즉 좌측인 동남측은 띠살문을 달아 출입이 가능하도록 만든 반면 우측인 동북측은 돌로 하방벽을 만들어 출입할 수 없으며 상부에 작은 창호를 만들어 두었다. 처마는 홑처마 이지만 기와 끝에는 막새를 달아 고급스럽게 만들었다.

안마당은 가운데 두고 구릉 위로 안채를 배치해 두었다. 'ㄱ'자 평면의 안채는 3자 정도의 높은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건물을 배치하였다. 평면은 대청마루를 가운데 두고 그 좌우에 2개씩 4개의 방을 두었다. 대청 북측은 안방과 윗방, 남측은 건넌방과 윗방을 배치하였는데 건넌방 앞쪽과 남측에 툇마루를 설치해 두었다. 건넌방 아궁이 함실은 앞쪽의 툇마루 아래에 설치해 두었다. 대청마루 뒤로는 나중에 약 3자폭으로 반침을 내달아 잡동사니를 넣어두는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대청을 중심으로 하는 이 부분은 2칸폭의 겹집으로 하고 그 아래로 1칸 폭의 홑집을 내달아 부엌과 세탁실 겸 샤워를 할 수 있는 다용도실을 두었다.

안채의 기단은 사괴석으로 쌓아 만들고, 초석은 사괴석을 사용하였다. 기둥은 원주와 방주를 섞어 사용하였는데 대청마루 전후 열과 부엌 가운데는 원주를 쓰고 나머지는 모두 방주를 썼다. 'ㄱ'자로 꺾이는 회첨부에는 방주를 세웠다. 기둥부재는 비교적 견실한 것을 사용하였다. 기둥머리에는 주두를 놓고 장여와 굴도리를 대들보와 엮었다. 대들보 밑에는 보받침을 끼워 단단하게 결구시키고 있다. 가구구조는 무고주 5량집으로 기둥 위에는 굴도리를 사용하였다. 특히 대청마루의 창방와 장여 사이에는 소로를 4개씩 끼워 장식적이고 고급스러움을 표현하고 있다. 대청마루 위의 휘어진 대들보 위에 중보를 올리고 판대공을 세운 다음 종도리를 받치도록 하였다. 그러나 안방과 건넌방 쪽의 중보 위에는 판대공을 쓰지 않고 동자기둥을 세운 다음 종도리를 올려 대청을 품위 있게 만들려는 의도를 볼 수 있다.

안채 창호는 대부분 띠살문을 달았으나 부엌은 장판문을 달고 안쪽에 알미늄문 하나를 더 달아두었다. 대청 천장은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정으로 하고 나머지는 모두 반자를 달았다. 지붕은 한쪽을 팔작, 다른 한쪽을 맞배로 하였는데 기와 끝에는 막새기와를 달아 주택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장식성을 지니고 있다.

이 가옥은 구한말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혼란스런 중앙정치권을 벗어나 한적한 이곳 초야에 묻혀 생활하려는 의도에서 지어진 건물이다. 이전 당시 마을은 민씨 가옥이 약 22가구가 있었으나 댐 수몰로 인해 모두 떠나가고, 이 가옥만 지금의 자리로 옮겨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이 가옥은 가운데 안마당을 중심으로 튼 '口'자집 구조를 하고 있는데 다른 사대부 가옥과는 달리 행랑채를 사랑채로 사용하려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안채에는 견실한 원주를 사용하고 기와 끝에 막새를 다는 등 장식과 품위를 위한 노력이 여러 곳에서 보이고 있다. 1979년 대청댐 수몰로 인해 이전되면서 부속채가 목조에서 벽돌조로 바뀌고, 부엌 끝에 세탁실을 내달이 일부 원형이 바뀌긴 했지만 대체적으로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