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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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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19-04-25 11:41 조회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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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_arrow.gif신대동(新垈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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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동의 입지와 자연환경
  • 신대동은 한국수자원공사 건너편에서 서쪽으로 넓게 퍼진 들이 있는 동(洞)으로 북쪽으로는 와동, 남쪽은 읍내동, 동쪽은 연축동과 와동, 서쪽으로는 갑천을 끼고 있으며 유성구 전민동과 문지동 그리고 원촌동에 접해있는 동(洞)이다.


  • 신대동은 계족산 줄기를 동쪽으로 배산으로 하고 서쪽으로는 갑천변에 들이 있었다. 예전에는 주로 도시근교 농업으로 채소재배가 활발하였다. 그러나 신대동 지역은 지대가 낮아 갑천이 범람하면 그 피해가 커서 신대동에 거주하는 주민은 별로 많지 않았다. 현재도 이곳은 대부분 논이고 기타 도시 근교농업으로 비닐하우스 재배 등을 조금하고 있다.


  • 현재의 신대동에는 경부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가 만나는 회덕분기점과 갑천 우안도로, 경부선철도와 회덕역, 대전, 신탄간 국도, 그리고 고속철도 등이 이곳을 지난다. 이와 같은 조건은 오히려 신대동을 도로, 철도 등으로 2분, 3분하여 오히려 신대동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곳은 주로 농토로 활용되고 있으나 농사를 위해 출입하는 것도 도로사정상 불편한 실정이다. 또한 신대동은 평지로 농토가 많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개발제한구역으로 취락시설 등이 매우 불량한 실정이다. 신대동에는 신대주공아파트가 유일한 아파트 단지이고 기타 산재한 몇 개의 마을이 있을 뿐 다른 집단취락은 없다. 이러한 외적인 조건으로 신대동에는 예전에서부터 특정성씨의 집성촌은 없었다.


  • 신대동의 동명을 갖게된 것은 이곳에 새로 터를 잡아 마을이 형성되었기에 새터, 새터말 또는 신대(新垈) 라 하였다. 예전의 신대는 현재의 지명인 갬재와 안갬재를 모두 포함하여 신대라 하였다.


  • 현재 신대동의 토지 이용실태를 『'99통계연감』을 통해서 살펴보면 총 2,322,141㎡의 면적 중, 전(田)이 125,841㎡로 5.4%, 답(畓)이 358,935㎡로 15.5%, 임야가 707,335㎡로 30.5%, 대지가 98,276㎡로 4%, 공장용지가 28,025㎡로 1.2%, 도로가 346,435㎡로 15%, 철도용지가 177,075㎡로 8%이고, 하천이 316,923㎡로 13.6% 등이다. 이러한 사실은 신대동의 농지는 전보다는 답이 훨씬 많은 지역임을 보여주고, 대지가 4%이고 공장용지가 1.2%로 주거지와 공장용지가 매우 적으며, 오히려 도로와 철도용지 그리고 하천이 상대적으로 많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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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동의 연혁
  • 신대동은 백제 때는 우술군이었으나, 신라시대에 비풍군으로 개명하였고, 그 밑에 유성현과 적오현(뒤에 덕진현)을 그 속현으로 두었다. 고려초기에는 비풍군을 회덕현으로 읍호를 바꾸었고, 이후 고려 현종 9년(1018)의 군·현 개편시 공주의 속현으로 귀속되었다. 그런데 고려시대에 유성현과 덕진현이 공주의 속현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 현종 9년의 군·현 개편시 유성현과 덕진현은 회덕의 속현에서 벗어나 공주의 속현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후 회덕현은 고려 명종 2년(1172)에 처음으로 감무(조선시대의 현감과 같음)를 두어 주현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 조선초기 태종 13년(1413)에 전국을 8도제로 개편하면서 행정구역을 서울→도→주·부·군·현→면(방·사)→리(동·촌) 체제로 편성하였다. 이에 따라 회덕현은 충청우도 공주목에 속하는 종6품의 현감이 다스리는 회덕현이 되었다. 이와 같이 8도제의 실시와 더불어 소현의 병합이 이루어졌는데 이 때에 유성현이 폐지되면서 그 영역이 회덕현과 진잠현에 속하게 되었다.


  • 조선 정조13년(1789)의 {호구총수}에 의하면 지금의 신대동은 회덕현 현내면 신대리(新垈里)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조선중기 때부터 행정구역과 지명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고종 32년(1895) 갑오개혁으로 인한 행정구역 개편으로 태종이래 실시되어오던 8도제가 폐지되고, 전국이 23부제를 실시하면서 종래의 부·목·군·현 등의 지방행정 단위를 모두 폐합하여, 336개 군을 신설하고 이를 23개 부에 속하게 하였다. 이로서 회덕현은 공주부에 속하는 27개 군의 하나인 회덕군으로 개편되었고, 신대동도 회덕군 현내면 신대리가 되었다. 이 당시 회덕의 구역은 기존의 회덕의 7개 면(현내면, 동면, 외남면, 내남, 서, 근북, 일도면)에 공주군의 5개 면(천내, 유등, 탄동, 구즉, 산내)과 청원군 주안면이 편입되어 이전보다 크게 행정구역이 확대되었다.


  •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회덕군과 진잠군으로 통합되면서 신대리는 신대리·목동·와동·연축동 각 일부를 합하여 대전군 내남면 신대리가 되었다. 1931년에는 대전면이 읍으로 승격하여 대전군 1읍 11면을 관할하게 되었고, 1935년 11월 1일에는 대전읍이 부로 승격됨에 따라 대전부와 대덕군과 분리되었는데, 이때 신대동은 대덕군 신대리로 남게 되었다. 1983년 대전시의 확장으로 유성읍과 회덕면 일원이 대전시에 편입되면서 신대동도 대전시 동구에 편입되었다. 그후 1989년 1월 1일 대전직할시의 확대로 대덕군의 폐지와 동시에 대덕구가 신설되어 신대동는 회덕 1동의 행정동에 소속된 법정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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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동의 전통마을
  • ○ 갬재 : 새터말, 새터, 신대(新垈)라고 불리우기도 하나 이 지역의 원명은 개금과 진현, 이후는 갬재와 안갬재이다. 새터말이라 불리우게 된 것은 새로 터를 잡아 마을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새터말 또는 신대라 한 것이다. 동서로는 불뭇골들과 신탄진·회덕간 국도사이, 남북으로는 신대주공아파트와 와동초등학교 사이가 된다. 경부선 철도 부설시 신대동 한가운데를 지나면서 서쪽으로는 5∼6호 정도가 남게 되었고, 대부분은 경부선 철도 동쪽에 주거지가 형성되었다. 그래도 호구 수는 많지 않아 총 30∼40호 정도이었다. 그 가운데 광산김씨가 10호 정도이고, 은진송씨가 5∼6호, 한산이씨 2호, 진주강씨1호, 기타 성씨로 주민들이 구성되어 있다. 갬재에는 특별히 주도하는 세거성씨는 없었다.


  • ○ 수척골(수척곡 水尺谷) : 갑천 쪽 각시바위와 용왕바위의 사이가 된다. 약 80년전 이곳 갑천에 수위를 측정하기 위하여 세운 수척(水尺)이 있었기에 수척골이라 한다. 성과 본관을 알 수 없는 2∼3호 정도가 거주하였던 소규모의 자연촌이었다.


  • ○ 안갬재 : 안감재, 내진현이라고도 한다. 불뭇골들과 갬재 사이로 갬재 안쪽에 마을이 있어 안갬재라 부른다. 3∼4호 정도의 밀양박씨와 진주강씨 등이 거주하였던 소규모의 자연촌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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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동의 세거성씨
  • 신대동에는 총 거주 인원도 적었을 뿐만 아니라, 특정성씨가 세거하는 집성촌도 없었다.

신대동의 옛 지명
  • ● 각시바위(각시바우) [바위] : 동성산업에서 서쪽으로 갑천가에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바위 밑에 깊은 강이 있었는데 예쁜 각시가 바위에서 강물에 떨어져 죽었다하여 각시바위라 부른다. 현재도 이 바위가 갑천가에 있다.

  • ● 갬재(진현) [고개] : 새터말과 동성산업 사이에 있다. 옛날에 이 산에 개금나무가 많아서 갬재라 불렀고, 낮은 산의 협곡이 개미의 허리처럼 생겼다하여 개미재, 갬재라 하였다. 갬재고개 남쪽 산 아래에는 마을을 갬재라 부르며, 갬재 즉 진현이라 부르는 산은 갑천가에 있는데 개금나무가 많은 산이라 갬재라 불렀다. 그 아래 있는 마을도 산 이름을 따서 갬재, 진현이라 부른다.

  • ● 들말 [마을] : 동성산업과 갬재 사이로 신대육교에서 바로 남쪽에 있다. 들 가운데 마을이 있다하여 들말이라 부른다.

  • ● 불뭇골들 [들] : 동성산업에서 북쪽, 안갬재에서 동쪽으로 경부선철로와 경부고속도로 건너에 있는 들이다.

  • ● 새터(신대, 개금, 재현, 진현) [마을] : 동서로는 불뭇골들과 신탄진, 회덕간 국도사이로 남북으로는 신대주공아파트와 와동초등학교 사이가 되며, 새로 터를 잡아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여 새터, 새터말, 신대라 한다. 이 지역의 원명은 개금과 재현으로 진현이라 부르던 곳이다. 그래서 우리 토속적인 말로 개금제라 불렀다. 이곳의 뒷동산에 개금나무가 많아서 그렇게 불렀는데 개금제를 빨리 부르면 갬재가 되어 부르던 것이 세월이 지나 새롭게 마을이 번창해지자 새터로 바뀌게 되었다.

  • ● 송수마루(송소마루) [마을] : 옛날에 이곳은 들이었으나 현재는 주공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마을 앞에 소나무가 동산을 이루고 있어 송소마루라 불리었으며, 마을사람들은 여름철에 이곳을 사랑방처럼 여겼다고 한다.

  • ● 수척골(수척곡) [마을] : 갑천쪽으로, 각시바위와 용왕바위의 사이가 된다. 약 80년전 이곳 갑천에 수위를 측정하기 위하여 세운 수척이 있어 수척골이라 한다. 이곳은 성관을 알 수 없는 2∼3호 정도가 거주하였던 소규모의 자연촌락이었다.

  • ● 수척골굴(수척터널, 수척곡수도) [굴] : 수척골과 육모종골 사이로 경부선철로의 굴이 수척골에 있어 수척골굴이라 한다. 현재도 이 굴이 이용되고 있다.

  • ● 신대들 [들] : 갬재마을 남쪽에 있는 들로 회덕인터체인지와 갑천 사이에 있다. 신대에 넓은 들이 있어 이를 신대들이라 한다.

  • ● 안갬재(안감재, 내진현) [마을] : 불뭇골들과 갬재 사이로 갬재 안쪽에 마을이 있어 안갬재라 부른다. 개미형국의 산세에 따라 개금나무가 있는 산 안쪽에 위치하였다 하여 안감재라고도 한다.

  • ● 역전마을 [마을] : 회덕역 부근의 마을을 역전마을 또는 역전이라고도 한다.

  • ● 오얏골들 [들] : 오얏골 마을의 서쪽에 들이 있어 오얏골들이라고 하며, 현대아파트와 회덕우체국 사이에 있다. 오얏골은 와동에 속해 있으나 오얏골들은 행정상으로 신대동이다.

  • ● 육모정 [농막] : 육모종골에 있으며 용왕바위 위에 육모정이 있다.

  • ● 육모종골(육모종굴) [골] : 수척터널에서 남쪽, 용왕바위에서 동쪽에 있다. 이 골짜기에 육모정이 있었기에 육모종골 또는 육모정굴이라 한다.

  • ● 용왕바위(용왕암) [바위] : 수척골에서 남쪽, 수척터널에서 서쪽 갑천가에 있다. 이 바위아래에 갑천의 물이 흐르는데, 이곳의 물이 매우 깊어 용이 살았다하여 용왕바위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