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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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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19-04-25 11:54 조회11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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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_arrow.gif목상동(木上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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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상동의 입지와 자연환경
  • 목상동은 지리적으로 대덕구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덕암동과 석봉동, 서쪽은 문평동, 남쪽은 신일동, 북쪽은 금강과 충북 현도면이 인접해 있는 마을이다. 목상동은 갑천하구와 금강과 만나는 지점의 넓은 평야지대에 위치해 있었다. 그래서 목상동의 주민들은 제3공단이 건설되기 이전에는 주민들의 생업은 주로 농업이었으나 넓은 평야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넉넉하지 못하였다. 그 이유로 매년 여름철 비가 조금만 많이 와도 홍수로 늘 금강이 범람하여 목상동 일대가 물에 잠기곤 하였다. 그런데 홍수는 역설적으로 농업에 많은 피해를 끼치기도 하였지만 농토를 비옥하게 하는 조건도 되어서 농사가 아주 잘되었다. 목상동은 홍수로 토질이 일반 농경지와 모래가 많이 섞인 사지로 되어 있었다. 모래가 많이 섞인 사지에서는 채소재배 등의 근교농업이 활발하였고, 특히 무와 배추의 재배가 아주 잘되었고 품질도 뛰어났다. 그래서 목상동의 주민들은 이곳의 무가 나라 임금께 진상하는 진상품이었다고 지금도 이야기하고 있다. 무 재배는 1989년 목상동이 공업단지로 개발되기 전까지도 활발하였다. 그래서 예전에는 갑천하구와 금강이 만나는 지점과 연해있는 목상동·문평동·신일동·덕암동의 뜰 전체를 새일 뜰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곳은 옛날에는 대체로 밭이었으나 수리조합을 결성하면서 약간의 밭이 논으로 개간되었다.

그러나 목상동 지역은 1989년에서 1991년에 3공단이 건설되었고, 1991년에서부터 1993까지 4공단이 건설되면서 목상동의 상당부분이 공단으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예전의 중리·도랫말·위남해·을미기 지역만이 택지로 개발되어 대규모 아파트와 단독주택 등이 건설되어 주거지역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예전에 목상동의 동쪽으로 야트막한 산을 배경으로 서쪽 새일 뜰을 전면으로 하여 소규모로 잘 발달되어 있었던 자연촌락은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 대규모로 주택이 건설되어 외부로부터 많은 인구가 유입해 들어 오게되어 더 이상 개발 전의 목상동 주민들만의 문화정체성은 극히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현재 목상동은 법정동으로는 대덕구에서 면적이 가장 작은 동이다. 대덕구에서 발행한『'99통계연감』을 통해 토지이용률을 살펴보면 전체토지가 704,803㎡인데 전(田)이 39,490㎡로 6%, 답(畓)이 49,239㎡로 7%, 임야가 129,423㎡로 18%, 대지가 175,086㎡로 25%, 공장용지가 153,177㎡로 22%이고 이외 기타토지로 되어있다. 이러한 토지 이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전과 답으로 이용되는 토지는 13% 정도이고, 대지가 25%이고, 공장용지가 22%인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현재 목상동의 토지는 대지와 공장용지로 이용되고 있는 실정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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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상동의 연혁
  • 목상동 지역은 백제 때는 우술군이었다가 신라시대에는 비풍군으로 개명하였고, 그 밑에 유성현과 적오현(뒤에 덕진현)을 그 속현으로 두었다. 고려 초기에는 비풍군을 회덕현으로 읍호를 바꾸었고, 이후 현종 9년(1018)에는 공주의 속현으로 귀속되었다. 그런데 고려시대 유성현과 덕진현이 공주의 속현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현종 9년의 군·현의 개편시 유성현과 덕진현이 회덕의 속현에서 벗어나 공주의 속현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후 회덕현은 명종 2년(1172)에 처음으로 감무(조선시대의 현감과 같음)를 두게 되어 주현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조선초기 태종 13년(1413)에 전국을 8도제로 개편하면서 행정구역을 서울→도→주·부·군·현→면(방·사)→리(동·촌) 체제로 편성하였다. 이에 따라 회덕은 충청우도 공주목에 속하는 종6품의 현감이 다스리는 회덕현이 되었다. 이와 같이 8도제의 실시와 더불어 소현의 병합이 이루어졌는데 이 때에 유성현이 폐지되면서 그 영역이 회덕현과 진잠현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 정조 13년(1789)의 {호구총수}에 의하면 지금의 목상동은 회덕현 근북면 목포리의 지명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조선 후기 고종 32년(1895) 갑오개혁으로 인한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태종이래 실시되었던 8도제가 폐지되고, 전국이 23부제를 실시하면서 종래의 부·목·군·현 등의 지방행정 단위를 모두 폐합하여 336개 군을 신설하고 이를 23개 부에 속하게 하였다. 이로서 회덕현은 공주부에 속하는 27개 군의 하나인 회덕군으로 개편되었고, 목상동도 회덕군 북면 목포리가 되었다. 이 당시 회덕의 구역은 기존의 회덕 7개 면(현내면, 동면, 외남면, 내남면, 서면, 근북면, 일도면)에 공주군의 5개 면(천내면, 유등면, 탄동면, 구즉면, 산내면)과 청원군 주안면이 편입되어 이전보다 크게 행정구역이 확대되었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회덕군이 진잠군과 통합되어 대전군이 되면서 목상동은 신흥리·목상리·목중리·목하리의 각 일부를 합하여 대전군 북면 목상리로 개편되었다. 1931년에는 대전군 대전면이 읍으로 승격하여 대전군이 1읍 11개 면으로 되었고, 1935년에는 대전읍이 부로 승격됨에 따라 대전부와 대덕군으로 분리되었는데, 이때 목상동은 대덕군 북면 목상리로 되었다. 1973년에는 북면이 신탄진읍으로 승격되면서 목상리는 신탄진읍에 속하게 되었다가 1989년 1월 1일 대전시가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구역확장으로 인한 대덕군의 폐지와 동시에 대덕구가 설치되면서 목상동은 대전광역시 대덕구에 소속된 행정동이자 법정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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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상동의 전통마을과 씨족

  • ○ 남해마을 : 남해마을은 남해, 남개, 목포 등으로도 불리던 마을이다. 옛 남해 마을의 위치는 지금의 한국타이어 대전공장에서 남쪽, 등마루와 목상동사무소 사이에 있었다. 남해마을은 이 근방에서는 100여 호가 넘는 제법 큰 마을로 목상동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었다. 옛날에는 이 마을 서쪽에 강이 있는데, 갑천의 물이 이 마을을 거쳐 금강으로 흘러갔다고 하여 이곳을 남개 또는 목포라 하였는데, 남개가 변하여 남해라고도 부른다. 또 이 부락 가운데에 남해양(南亥向)으로 쓴 분묘가 있어 남해라고 하였고, 남해마을은 옛날에는 100여호의 큰 부락이었는데 당시 마을에는 동래정씨가 10여호, 김해김씨가 20여호 등 중심을 이루었고 밀양박씨, 안정나씨가 5호정도 이었고 기타 여러 성씨들이 모여 살았다. 옛 남해마을 지역에는 현재에는 목상동사무소, 목상파출소가 있으며, 현대아파트 및 삼창아파트와 주택지역으로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 목상마을 : 목상에 당시 60여 호가 거주하였는데, 도랜말(도래말)·중리·위남해 등으로 불리던 자연촌락이 분산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도랜말·중리·위남해 등의 촌락이 하나의 생활권이었고 한마을처럼 지냈다고 한다. 도랜말에는 약 20호가 거주하였는데 김해김씨가 6∼7호, 경주최씨가 6∼7호 정도로 큰 성씨를 이루고 있었고, 나머지는 본관을 알 수 없는 김씨·박씨·진씨 등이 어울려 살았다. 그리고 중리·위남해을 합쳐서 약 40여호가 되었는데 위남해에는 창원황씨·김해김씨 등이 혼합해서 살았고, 중리에는 경주최씨·삼척진씨들이 많이 살았다. 현재는 4공단에 편입되었고 일부는 다사랑아파트·상록수아파트 등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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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상동의 세거성씨

  • 목상동은 마을의 입지가 금강과 갑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하여 잦은 홍수의 범람으로 피해가 많아 주민들의 유입과 이거가 많았던 동이다. 따라서 목상동에 아주 오래된 집성촌이나 수 백년을 세거한 성씨는 찾을 수 없었다. 그나마 목상동에 오래 세거한 성씨들은 동래정씨가 약 10가구, 김해김씨 약 28가구, 안정나씨가 5가구, 밀양박씨, 경주최씨가 6∼7가구 정도로 큰 성씨를 이루고 있었고, 본관을 알 수 없는 김씨·박씨·진씨·회덕황씨·김해김씨 등이 누대 세거하여온 성씨들이다. 그러나 이들 세거 성씨들에 관해서는 공단개발로 인하여 타 지역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구체적 파악을 할 수는 없었다.


목상동의 옛 지명

  • ● 남해(남개, 목포) [마을] : 한국타이어 신탄진 공장에서 남쪽, 등마루와 목상동 사무소 사이에 있었던 마을로 목상동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마을이다. 옛날에는 갑천의 물이 이 마을을 거처 금강으로 흘러갔다고 하여 남개라 하였는데, 이것이 변하여 남해라 부른다.

  • ● 도랜말(도란말, 도래말, 여래말) [마을] : 목상 내의 부락으로 남해마을에서 서쪽에 안산에서 북서쪽에 있는데, 400년 전에는 갑천이 마을 앞으로 돌아서 금강으로 흘러갔다고 하는데, 그때 물이 여울을 이루었다고 하여 여래말, 도랜말이라 부른다.

  • ● 도롱골 [골] : 다사랑 아파트와 위남해 사이에 있는 골짜기이다.

  • ● 등마루 [마루] : 남해마을과 목상다리 사이에 위치한 언덕이다.

  • ● 목상(木上, 위남해, 목상리) [마을] : 목상은 도랜말·중리·위남해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마을인데, 각기 분산되어 거주하였던 자연촌락이다. 그러나 도랜말·중리·위남해 등의 촌락은 하나의 생활권이었고 한마을처럼 지냈다고 한다. 현재는 4공단에 편입되었고 일부는 다사랑아파트·상록수아파트 등이 들어서 있다.

  • ● 목상교 [다리] : 망골천에 놓여진 다리로서 석봉동과 목상동에 연결된 도로에 위치하고 있다.

  • ● 안산 [산] : 중리마을과 도랜말 사이에 있는 작은 산으로, 부락 안에 산이 위치하고 있어 이를 안산이라 부른다.

  • ● 옴팽이(옴팡이) [들] : 도랜말에서 서쪽에 있는 들로 논가운데 움푹 파인 곳이 있어 이를 옴팽이라 부른다.

  • ● 윗남해(위남해, 목상) [마을] : 지형 상으로 남해마을 위쪽에 있으므로 윗남해 또는 목상이라 부른다. 옛날에는 산이었으나 현재는 개발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 ● 중리(中里) [마을] : 안산에서 동쪽으로 도룡골과 안산 사이가 된다. 옛날에는 산이었으나 현재는 마을이 들어서 있다. 남해와 윗남해의 중간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중리하고 부른다.

  • ● 삼거리 [거리] : 새알뜰 가운데 삼거리가 있었다. 이곳 삼거리에 농막이 있었는데 두레 때 쉼터였다.

  • ● 굼벙뜰(둠벙들) [들] : 들 가운데 둠벙이 있어 둠벙들이라 하였으나 이것이 변하여 굼벙뜰이라고 부른다. 지금의 유한 킴벌리 공장이 있는 곳이다.

  • ● 추경전 [밭] : 옛날에는 갑천이 금강과 만나 양 갈래로 흐르면서 가운데 섬 같은 큰 밭이 형성되었다. 이곳을 추경전이라 한다. 이곳에서는 주로 무 농사를 지었는데 품질이 아주 우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