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메뉴로 바로가기
추억을 만드는 대덕문화원
전통마을
· HOME > 대덕의역사문화 > 전통마을

문평동

페이지 정보

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19-04-25 11:56 조회131회 댓글0건

본문

 

icon_arrow.gif문평동(文坪洞)

munpyung.jpg 

문평동의 입지와 자연환경
  • 문평동 지역은 지리적으로 대덕구 서북쪽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목상동, 남쪽은 신일동, 서쪽은 유성구 봉산동, 북쪽은 충북 청원군 현도면과 인접해 있는 동(洞)이다. 문평동은 넓은 들이 있어 먼벌 또는 문평(文坪)이라고 하였다. 문평동 지역은 갑천이 금강 상류와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넓은 평지는 농경지로 이용하였으나 여름철 비가 많이 오면 금강이 범람하여 홍수 피해가 컷던 지역이다. 그래서 문평동은 옛날에는 주로 밭으로 농사를 하였고, 일제 때에는 배나무 밭이 많았다. 문평동의 들을 새알들이라 하는데 여기서 생산되는 무는 전국 최고의 품질로 유명했으며, 조선시대에는 임금님께 진상하였다고 한다. 해방 후 50∼60년대까지도 무 재배가 활발하였는데 그후 수리조합이 만들어지면서 점차 밭을 논으로 개간하여 벼농사를 많이 짓게 되었다.

문평동은 금강과 갑천이 만나는 지점이라서 비가 많이 오면 양쪽의 물이 합쳐지면서 역류하여 논과 밭, 그리고 마을로 범람하여 홍수피해에 항시 노출되어 있었던 지역이었다. 따라서 마을에서는 평상시에는 강에서 나룻배로 사용하고 수해 때에는 피난용으로 100명 이상이 탈수 있는 배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산이 없는 넓은 들판이라 수해가 나면 대피할 곳이 마땅치 않아, 마을 앞뜸과 뒷뜸에 하나씩 인공적으로 토산을 높이 쌓았다. 토산에는 큰 건물을 지어 놓고 수해 때에는 가재도구·곡식 등을 운반하여 보관하는 곳으로 사용하였다. 토산의 건물은 앞뜸 것이 규모가 크고, 뒷뜸의 토산과 건물은 앞뜸 것에 비하여 조금 작았다. 예전에는 두레 활동을 통해 일년에 한번씩 토산제를 지냈다.

그리고 문평동의 마을은 넓은 들에 위치하여 생업이 농업이었고, 농사와 관련된 두레 풍속이 예전에서부터 전해져, 다른 지역에 비해 두레가 활발하였다. 때문에 문평동 들말의 두레는 토박이들을 중심으로 지금까지도 전승되어 온다. 이외에도 농업과 관련된 생활문화와 홍수에 관련된 민속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문평동 들말 두레는 전승자에 의하여 재현되었고, '96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여 대통령상을 수상하였으며, 각종 행사 때면 시범공연을 보여주기도 한다.

예전에는 문평동이 신탄진 일대의 중심지로 문평동에서 5일 장이 섰었다. 그러나 1925년에 장마로 인해 온 마을이 떠내려가자, 5일장은 신탄진역 부근으로 옮겨가면서 3·8일장으로 변하였고 취락도 신탄진역을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문평동은 공단개발 이전에는 전체가 넓은 들이었으나, 현재는 제3 산업단지가 조성되었다. 문평동의 토지이용률을 대덕구『'99통계연감』을 통해서 살펴보면 전체 면적 2,216,920㎡중에 전(田)이 185,758㎡로 8%, 답(畓)이 5,149㎡로 0.2%, 임야가 26,880㎡로 1%, 공장용지가 1,058,422㎡로 48%이다. 즉 현재의 문평동은 전체 면적의 절반 정도가 공단으로 개발되었다. 문평동에는 공단이외도 공공기관으로 대전북부경찰서, 공단관리본부, 대덕우체국, 그리고 폐수종말처리장 등이 있다. 문평동의 자연마을로는 들말(坪村)이 있었다. 옛날에는 이 들말 가운데에 밭이 있었는데, 이 밭을 중심으로 하여 남쪽은 앞뜸이고 북쪽은 뒤뜸이었다. 그러나 들말의 주민들은 제3산업단지가 들어섬에 따라 모두 신탄진·목상동·덕암동 지역이나 타지로 이주해 나갔다.

top2.gif

문평동의 연혁
  • 문평동 지역은 백제 때는 우술군이었다가, 신라시대에는 비풍군으로 개명하였고, 그 밑에 유성현과 적오현(뒤에 덕진현)을 그 속현으로 두었다. 고려초기에는 비풍군을 회덕현으로 읍호를 바꾸었고, 이후 현종 9년(1018)에는 공주의 속현으로 귀속되었다. 그런데 고려시대 유성현과 덕진현이 공주의 속현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 현종 9년의 군·현의 개편시 유성현과 덕진현이 회덕의 속현에서 벗어나 공주의 속현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후 회덕현은 고려 명종 2년(1172)에 처음으로 감무(조선시대의 현감과 같음)를 두게 되어 주현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조선 초기 태종 13년(1413)에 전국을 8도제로 개편하면서 행정구역을 서울→도→주·부·군·현→면(방·사)→리(동·촌) 체제로 편성하였다. 이에 따라 회덕은 충청우도 공주목에 속하는 종6품의 현감이 다스리는 회덕현이 되었다. 이와 같이 8도제의 실시와 더불어 소현의 병합이 이루어졌는데 이 때에 유성현이 폐지되면서 그 영역이 회덕현과 진잠현에 속하게 되었다.

정조 13년(1789)의 {호구총수}에 의하면 지금의 문평동 지역은 회덕현 근북면 평촌리이었다. 조선 후기 고종 32년(1895) 갑오개혁으로 인한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태종이래 483년간 지속되었던 8도제가 폐지되고, 전국이 23부제를 실시하면서, 종래의 부·목·군·현 등을 폐합하여 336개 군을 신설하고 23개 부에 속하게 하였다. 이로서 회덕현은 공주부에 속하는 27개 군의 하나인 회덕군으로 개편되었고, 이에 회덕군 북면 문평리가 되었다. 이 당시 회덕의 구역은 기존의 회덕의 7개 면(현내면, 동면, 외남면, 내남면, 서면, 근북면, 일도면)에 공주군의 5개 면(천내면, 유등면, 탄동면, 구즉면, 산내면)과 청원군 주안면이 편입되어 이전보다 크게 행정구역이 확대되었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회덕군과 진잠군이 통합되어, 대전군으로 되면서 문평리·신흥리·목중리·구즉면 봉산리의 각 일부가 합하여져 대전군 북면 문평리가 되었다. 1931년에는 대전군 대전면이 읍으로 승격하여 대전군 1읍 11개 면으로 되었고, 1935년에는 대전읍이 부로 승격됨에 따라 대전부와 대덕군으로 나뉘게 되면서 문평동은 대덕군 북면 문평리로 되었다. 1973년에 또다시 북면이 신탄진읍으로 승격되면서 문평동은 신탄진읍에 속하게 되었고, 1989년 1월 1일 대전직할시의 확대로 대덕군의 폐지와 동시에 대덕구가 설치되면서 문평동은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목상동에 소속되었다.

top2.gif

문평동의 전통마을과 씨족

○ 들말(평촌 坪村) : 옛날에는 들말 가운데에 밭이 있었는데, 이 밭을 중심으로 하여 2개의 자연촌락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당시의 행정구역으로는 앞들말이 문평 2구이었고, 뒷들말이 문평 1구이었다. 이 가운데 남쪽에 있었던 마을을 앞뜸 혹은 앞들말이라 하였고, 북쪽에 있었던 마을을 뒤뜸, 뒷들말이라 하였다. 이 마을들은 1989년 제3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편입되어 없어지고 마을주민들은 인근 목상동 주거지역과 덕암동 및 기타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들말이 공단개발 이전에는 앞 들말과 뒷 들말을 합하여 100호 정도가 거주하였다. 이 가운데 밀양손씨가 가장 큰 대성으로 20∼30호 세거하였다. 문평에 세거한 밀양손씨들은 유성의 금고동에 세거하였던 사람들이 문평 들말로 이주하여 온 것이다. 밀양손씨가 들말에 이주하기 전에는 본관을 알 수 없는 진씨들이 3∼5호 거주하였었는데 이들은 홍수 등의 범람으로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고, 이주한 곳은 알 수 없다. 들말의 주민들은 밀양손씨를 제외하면 여러 성씨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들말이 자주 홍수의 피해를 입게되자 이로 인한 주민들의 유입과 이주가 활발하였기 때문이다. 예컨대 덕암동의 새뜸(新村)도 1946년 대홍수로 문평동의 주민들이 이주하여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옛 들말의 지역은 제3산업단지의 조성으로 역 50여 개 업체가 입주하고 있다.

top2.gif

문평동의 세거성씨
  • ○ 밀양손씨(密陽孫氏) : 시조 손순의 선계(先系)는 신라 6부촌장의 한 사람인 무산대수촌장 구례마이다. 구례마는 다른 5부 촌장과 함께 박혁거세를 신라왕으로 추대하였다. 그후 유리왕 9년(32년)에 손씨 성을 사성받아 손씨가 되었다. 그러나 그후의 세계는 자세치 않다. 회덕지역에 거주하는 밀양손씨는 유성구 금고동에서 이주하여 왔다고 하며, 금고동 입향한 입향조는 31세 손중사로 밀양손씨 진사공파 부위공 자손들이다. 손중사가 어떤 계기로 금고동에 입향하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손중사의 처가 창녕성씨인 것으로 보아 처향과 관계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금고동은 창녕성씨의 집성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금고동에서 문평동으로 이주한 밀양손씨는 손중사의 5대 손이고 시조로부터 36세인 손계원의 아들인 손이관과 손후관이다. 손이관·손후관이 금고동에서 문평동으로 이주하게된 사유와 연대를 명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밀양손씨가 문평동에 입향한 시기는 입향조 손이관의 출생년이 족보상에 조선 숙종 3년(정사, 1677)이라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손이관이 출생하여 금고동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고, 혼인하면서 이곳으로 분가하였다고 추정하면 입향시기는 1600년대 말에서 1700년대 초반이라고 생각된다.

top2.gif

문평동의 옛 지명

  • ● 갑천(甲川) [내] : 문평동과 유성구 봉산동 사이에 흐르는 천(川)으로, 이곳이 갑 천의 하류가 되며 갑천의 물은 금강과 합수한다.

  • ● 구장터(구장테, 신흥장터, 신흥장) [터] : 신흥리에 있었던 장터를 구장터라 한다. 장이 처음에는 신대리 앞 들판에 있었는데, 장마로 인하여 문평리의 이곳으로 옮 겨오자 새로이 조성된 장(場)이라서 신흥장, 신흥장터라 하였고, 1925년 장마로 신흥장을 비롯 온 마을이 떠내려가자, 장을 또다시 신탄진역 앞으로 옮겨가, 이곳 이 전에 장이 섰던 자리라 하여 구장터라 부른다. 지금의 한국타이어 공장부근이 된다.

  • ● 농막 [거리] : 시알들에 있으며 신탄진과 구즉, 들말과 신일동으로 연결되는 삼거 리 위치에 농막이 있었다. 현재의 제3공단 대우강업 앞 부근이 된다.

  • ● 뒤뜸 [들] : 들말에서 북서쪽에 있다. 현재 폐수종말 처리장과 폐기물 매립장 부 근으로 앞뜸·뒤뜸이 있었는데 북쪽 높은 쪽이 뒤뜸이고 뒤로 금강 물이 흘렀다.

  • ● 들말(坪村) [마을] : 문평동 내에 넓은 들이 있었고, 이 들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 이라 하여 들말이라 불렀으며, 들말을 중심으로 하여 남쪽은 앞뜸이고 북쪽은 뒤 뜸이라 하였다. 들말 주민들은 제3공단이 들어섬에 따라 이주하였다.

  • ● 바구니나루 [나루터] : 지금의 문평동과 구즉 사이로 갑천에 놓여진 다리가 구즉 교인데, 다리 부근이 바구니 나루터이다. 옛날에는 다리가 없어 나루터를 이용하 여 구즉과 문평동·신탄진을 왕래하였다.

  • ● 삼거리[거리] : 시알들에 있으며 신탄진과 구즉, 들말과 신일동으로 연결되는 삼 거리이다. 현재의 제3공단 대우강업 앞 부근이 된다.

  • ● 성어마루들(성해마루들) [들] : 농막삼거리와 갑천사이의 들을 말한다. 농막삼거리 가 현재의 대우강업 앞에 있었기에 갑천 쪽으로 백양·기흥기계·한국중기·대창 섬유 등의 부근이 된다.

  • ● 시알들(시알뜰, 새일들) [들] : 현재 문평동 3공단과 신일동 4공단 지역이다.

  • ● 신대들 [들] : 현재의 3공단 지역이 된다.

  • ● 신흥장 [마을] : 문평의 동쪽으로 신대리 들판 앞에 장이 생겨나자 마을도 함께 생겨나자 이 마을을 신흥장이라 불렀다.

  • ● 앞뜸 [들] : 들말에서 남쪽으로는 앞뜸이고 북쪽으로는 뒤뜸인데, 앞뜸은 현재 북 부경찰서, 자동차 검사소, 우체국, 공단주유소 부근이다. 들말에서 남쪽으로 앞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앞뜸이라 부른다.

  • ● 앞강 [강] : 앞뜰말 서쪽 편으로 흘러가는 갑천을 앞강이라고 불렀다.

  • ● 모듬뽀리 [합수머리] : 갑천과 금강이 합수되는 지점을 합수머리 혹은 모듬뽀리 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