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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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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19-04-25 11:58 조회15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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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_arrow.gif신일동(新一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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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일동의 입지와 자연환경
  • 신일동은 지리적으로 대덕구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덕암동과 상서동, 남쪽은 유성구 용산동과 탑립동, 서쪽은 유성구 관평동, 북쪽은 문평동과 목상동에 인접해 있다. 예전에는 서쪽으로 낱으막한 산을 두르고 그 밑으로부터 목상동까지 넓은 들이 형성되어 있던 곳으로 산아래 구릉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자연마을들이 잘 발달되었던 곳이다.

신일동의 자연마을은 가경재·가운데뜸·계담장터(구장터)·말동배(맛동배)·산정말(계수, 지수, 새터, 신대, 산정촌)·양달뜸·옴팽이·웃말(웃뜸, 계상리, 상촌)· 웃을미기(윗을미기)·을미기(여울목, 을탄)·중뜸(중말, 중촌) 등으로 이루워져 있으며, 문화유적으로는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선조 때 장령과 호조참의를 지낸 정복시가 이 마을에 정자 계담대를 지었고, 그후 조선후기 고창현감을 지낸 계담 송국사가 계담대가 있던 자리에 다시 풍월정이란 정자를 짓고 이곳에서 우암 송시열과 동춘 송준길 등과 학문을 논하며 즐거움을 함께 하였던 곳이 바로 이 지역이다.

현재의 신일동은 주로 남북으로 뻗은 야산을 배경으로 서쪽으로 발달한 지역으로 주거밀집지역과 제3·4 산업단지가 들어서 있는데 입주 업체로는 한라공조·신호제지·삼양사 등이 있다.

현재 신일동의 토지지목별 현황을 대덕구청에서 발행한『'99통계연감』에 의해 살펴보면 총 면적이 2,689,805㎡이다. 이 가운데에서 전(田)이 96,779㎡로 4%, 답(畓)이 59,098㎡로 2%, 임야가 397,805㎡로 15%, 대지가 63,403㎡로 2%, 공장용지가 1,411,260㎡로 52.5% 등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현재의 신일동은 제3·4 산업지단의 개발로 대부분 공장용지로와 임야로 되어있고, 그 중 일부가 전답과 대지로 되어 있는 전형적인 산업단지의 중심이 된 동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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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일동의 연혁
  • 신일동 지역은 백제 때는 우술군이었다가, 신라시대에는 비풍군으로 개명하였고, 그 밑에 유성현과 적오현(뒤에 덕진현)을 그 속현으로 두었다. 고려초기에는 비풍군을 회덕현으로 읍호를 바꾸었고, 이후 고려 현종 9년(1018)에는 공주의 속현으로 귀속되었다. 그런데 고려시대 유성현과 덕진현이 공주의 속현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현종 9년의 군·현의 개편시에 유성현과 덕진현이 회덕의 속현에서 벗어나 공주의 속현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후 회덕현은 고려 명종 2년(1172)에 처음으로 감무(조선초기의 현감과 같음)를 두게 되어 주현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조선초기 태종 13년(1413)에 전국을 8도제로 개편하면서 행정구역을 서울→도→주·부·군·현→면(방·사)→리(동·촌) 체제로 편성하였다. 이에 따라 회덕은 충청우도 공주목에 속하는 종6품의 현감이 다스리는 회덕현이 되었다. 이와 같이 8도제의 실시와 더불어 소현의 병합이 이루어졌는데 이 때에 유성현이 폐지되면서 그 영역이 회덕현과 진잠현에 속하게 되었다.

정조 13년(1789)의 {호구총수}에 의하면 현재의 신일동(신대)은 회덕현 근북면 신대리(新垈里 ; 1989년 이전의 신일동의 본래 지명)로 기록되어 있어, 조선중기에 이미 신대리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고종 32년(1895) 갑오개혁으로 인한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태종이래 482년간 실시되어오던 8도제가 폐지되고, 전국이 23부제를 실시하면서, 종래의 부·목·군·현 등의 지방행정 단위를 모두 폐합하여 336개 군을 신설하고 이를 23개의 부에 속하게 하였다. 이로서 회덕현은 공주부에 속하는 27개 군의 하나인 회덕군으로 개편되었고, 이에 따라 신일동(신대)도 회덕군 북면 신대리가 되었다. 이 당시 회덕의 구역은 기존의 회덕의 7개 면(현내면, 동면, 외남면, 내남면, 서면, 근북면, 일도면)에 공주군의 5개 면(천내면, 유등면, 탄동면, 구즉면, 산내면)과 청원군 주안면이 편입되어 이전보다 크게 행정구역이 확대되었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회덕군과 진잠군이 통합되어 대전군으로 되면서 신일동(신대)은 계상리·학소리·목중리 각 일부와 구즉면 봉암리·봉산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대전군 북면 신대리(新垈里)로 개편되었다. 1935년 11월 1일에는 대전읍이 부로 승격됨에 따라 대전부와 대덕군으로 분리되는데, 이때 신일동(신대)은 대덕군 북면 신대리가 되었다. 1973년 북면이 신탄진읍으로 승격되면서 신일동(신대)은 신탄진읍에 속하게 되었고, 1989년 1월 1일 대전직할시의 확대로 대덕군의 폐지와 동시에 대덕구가 설치되면서 신일동(신대)은 목상동에 속한 법정동이 되었다. 그러나 이때 회덕에 신대동이 이미「신대(新垈)」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고, 1개 구(區)에 2개의 신대동이 존재할 수 없다고 하여, 신탄진 지역의 신대동은 신일동으로 동명을 변경하게 되었다. 또한 신일동 지역에 대전 제3·4 산업단지가 들어서면서, 원주민들은 신탄진 부근지역과 대전 등지로 대부분 이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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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일동의 전통마을과 씨족
  • ○ 신대리(을미기) : 신대리를 을미기라고도 하는데, 이와 같이 부르게 된 것은 을미기라는 뱀은 등에 붉은 점이 점점이 있는데, 신대리의 자연촌락이 산밑을 따라 길게 늘어져 있는 것이 마치 을미기라는 뱀의 무늬와 같아 보였다고 하여, 이 마을을 을미기라고 한다. 신대리 마을에는 대략 34호 정도가 거주하였다. 을미기의 조그마한 자연촌락으로는 장고개 마을과 승적골이 있다. 장고개 마을은 사람들이 장을 보러 넘어 다니는 고개에 마을이 위치하고 있어 장고개 마을이라 부른다. 이 마을에는 약 8호가 거주하였는데 창원황씨가 3호, 김해김씨가 2호, 경주최씨가 1호, 보성오씨가 1호 정도가 있었고, 가장 오래 전부터 세거해온 성씨는 창원황씨와 김해김씨이고 그 다음에 경주최씨와 보성오씨가 입향하였다고 한다.

승적골은 마을 뒷산에 절이 있어서 승적골이라 하였다. 이 마을에는 5∼6호 정도가 거주하였는데, 1946년 해방 다음해의 홍수 때 산사태로 3호가 물에 떠내려갔고, 그 후에는 창원황씨 1호, 은진송씨 1호와 본관을 알 수 없는 이씨 1호, 장씨 1호가 거주하였다.

○ 계담장터(구장터) : 계담장터는 산정말에서 남쪽, 지수에서 서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는 이 지역에 가축시장이었다. 경부선철도가 부설되기 전에는 계담장터에 우시장이 섰는데, 소 이외도 닭이나 여러 짐승을 사고 파는 장이라 하여 이를 계담장터라 불렀다고 하며, 조선 선조 때 지평과 호조참의를 지낸 정복시가 이곳에 정자를 짓고 계담대(桂潭臺)라 이름하였고, 이후 조선 후기 고창현감을 지낸 송국사가 벼슬을 버리고 회덕에 돌아와, 계담대가 있었던 자리에, 다시 정자를 짓고 풍월정(風月亭)이라 하였는데 그의 호가 계담(桂潭)이다. 따라서 정자명 계담과 송국사의 호가 계담으로 이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후 계담장이 큰 장마로 인하여 장을, 신흥리로 옮겨가게 되자 이곳을 구장터라 부르게 되었다. 이 마을은 80∼90년전 이전부터 형성되어 있었지만, 가축시장이 옮겨간 후로는 1가구정도 밖에 살지 않았다.

○ 말동배(맛동배) : 말동배 마을은 맛동배라고도 부른다. 이 마을은 산정말에서 남쪽, 가운데뜸에서 서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말동배 마을에는 창원황씨 2호, 원주변씨 2호, 본관을 알 수 없는 유씨 2호, 이씨 3호, 박씨 등과 약간의 각성들이 거주한 마을이다.

○ 산정말 : 산정말은 가운데뜸에서 북서쪽, 텃골에서 남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이 마을 뒤에 매봉재가 있는데 달이 떠오를 때 이곳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보면 달이 부락을 비추는 경관이 마치 물같이 흘러가는 형국이라서 계수라 하였으며, 옛날에는 갑천(甲川)이 마을 앞으로 흘러갔다고 하여 지수라고도 부른다. 또한 산 한가운데에 샘(井)같이 생긴 부락이 있다하여 산정말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마을 내에 조그마한 자연촌락으로는 아래뜸, 중뜸, 위뜸이 있는데, 이 세개의 자연촌락을 각각 나눠 부르기도 하였고, 자연촌락들을 모두 합하여 산정말·새터·신대(新垈)·계수·지수·산정촌(山井村)라고 불렀다.

산정말에는 본관을 알 수 없는 전씨 3호, 유씨 2호, 이씨 1호, 박씨 2호, 고씨 1호 등 각성들이 거주하였고, 이 마을을 주도하거나 집성촌을 이룬 성씨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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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일동의 세거성씨
  • 신일동에는 집성촌을 이룬 동족부락은 없었고, 각성받이다. 세거 성씨로는 신대리(을미기)에는 계담대를 건립하고 이 마을에서 거주한 조선중기의 문신 정복시이다 그의 본관은 동래로 입향사유나 시기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이곳에서 세거하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도 그의 자손들이 회덕에 많이 퍼져 살고 있다. 그 외에도 창원황씨와 김해김씨가 이곳에서 오랫동안 세거 해왔다고 하나 정확한 입향 사유나 시기는 알 수 없다.
신일동의 옛 지명
  • ● 가운데뜸 [마을] : 을미기와 승적골 사이의 마을을 가운데 뜸이라 하였다.

  • ● 가작굴(가잿굴) [골] : 웃뜸과 양수장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이 골짜기에 가재가 많아서 가잿골 또는 가작굴이라 부른다.

  • ● 구렁수멍(구름수멍) [내] : 산정마을에서 서쪽에 있는 냇가로, 동쪽의 지수골과 웃뜸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이곳을 지나 갑천으로 빠진다.

  • ● 계담장터(구장터) [마을] : 계담장터는 산정말에서 남쪽, 지수에서 서쪽에 있는 마 을로 옛날에는 이 지역이 가축시장이었는데, 소 이외 닭이나 여러 짐승을 사고 파는 장이라 하여 이를 계담장터라 하였다고 하며, 또 조선전기 때 문신 정복시 가 이곳에 정자를 짓고 계담대라 하였으며, 조선후기 때 고창현감을 지낸 송국사 의 호가 계담(桂潭)인데, 그가 이곳 계담대가 있던 자리에 다시 정자를 짓고 풍월정이라 하였다. 따라서 계담장터는 정복시가 지은 계담대와 송국사의 호인 계담에서 유래되었다고 본다. 그후 큰 장마로 인하여 장을 신흥리로 옮겨가게 되자 이곳을 구장터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마을이 80∼90년 전부터 동네가 형성되었지만 가축시장이 옮겨간 후로는 1가구정도 밖에 살지 않았다.

  • ● 국계날맹이 [들] : 장고개에서 서남쪽, 텃골의 북쪽에 있는 들을 말한다. 들 중에 제일 높은 지역을 국계라 하는데, 물이 채워지지 않아서 날망이라 하였다.

  • ● 굼벙뜰 : 푯대거리에서 북쪽에 있다. 시알들 전체에서 가장 낮아서 물이 둠벙 마 냥 있었고, 이곳에 물방앗간이 있었다.

  • ● 네거리 [거리] : 산정마을과 가운데 뜸 사이에 있다. 윗지수와 말동배, 산정마을과 가운데뜸이 교차되는 사거리로 이를 네거리라고 부른다.

  • ● 말동배(맛동배) [마을] : 산정마을에서 남쪽, 가운데 뜸에서 서쪽에 있다. 옛날에 이곳에는 소(牛)시장이 있었는데, 큰 장마로 인하여 신흥리로 옮겨가고 지금은 몇 가구의 마을이 있다. 계담장터와 말동배는 말둥배산 밑에 있는 마을로 두 지역이 가축시장이었다. 말동배는 소 시장이고, 계담장터는 소 이외 닭이나 기타 짐승을 취급하는 가축시장이었다.

  • ● 바위백이 [바위] : 장고개 뒷산, 윗을미기에서 남동쪽에 있다. 신일동과 상서동, 덕암동과 경계가 되는 이 산 능선에는 여러개의 바위가 박혀 있는데 이를 바위 백이라고 부른다.

  • ● 비성굴 [골] : 삼파굴의 남쪽에 있었던 골짜기인데 지금은 경부고속도로가 나면서 없어졌다.

  • ● 방죽거리다리 : 방죽에서 남쪽으로 있는 다리이다.

  • ● 산정말(계수, 지수, 새터, 신대, 산정촌) [마을] : 가운데뜸에서 북서쪽, 텃골에서 남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이 마을 뒤에 매봉재가 있는데 달이 떠오를 때 이곳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보면 달이 부락을 비추는 경관이 마치 물같이 흘러가는 형국 이라서 계수라 하였으며, 옛날에는 갑천(甲川)이 마을 앞으로 흘러갔다고 하여 지 수라고도 부른다. 또한 산 한가운데에 샘(井)같이 생긴 부락이 있다하여 산정말이 라고 부른다. 그리고 마을 내에 조그마한 자연촌락으로는 아래뜸, 중뜸, 위뜸이 있는데, 이 세개의 자연촌락을 각각 나눠 부르기도 하였고, 자연촌락들을 모두 합 하여 산정말·새터·신대·계수·지수·산정촌라고 불렀다.

  • ● 상포정 [산] : 을미기 마을에서 동쪽에 있는 산을 상포정이라 한다. 이 근처에서 는 제일 높은 산이다.

  • ● 성에마루(성어마루) [들] : 푯대거리에서 북쪽에 위치한다. 시알들에서 지대가 제 일 높은 들로써 옛날에 한 가구와 주막집이 있었는데 홍수로 떠내려갔다.

  • ● 시알들(새일들) [들] : 장고개에서 서쪽에 있는 들로 서쪽으로는 갑천, 북쪽은 3공 단 앞, 남쪽으로는 말동배와 인접된 매우 넓은 들이다. 이 곳에 무를 재배하였는 데 가장 맞이 좋았다고 하며, 임금님께 올리는 진상품이었다고 한다. 시알들 안에 는 성마루·푯대거리·계담장터·구렁수멍·삼거리·옴팽이·농막 등이 있다. 현 재는 3·4공단이 자리하고 있다.

  • ● 신대저수지(을미기방죽) [못] : 시알들의 북동쪽, 을미기에서 북서쪽에 있다. 일 제시대 때에는 잉어를 키우는 양어장이었으며 그후에 저수지가 되었다. 현재는 쓰레기가 매립된 터로 을미기공원이 되었고, 신대리에 있었기 때문에 신대저수지 라고 불렀다. 또 을미기마을 앞에 있었기 때문에 을미기방죽이라고도 하였다.

  • ● 양달뜸 [마을] : 산정말과 웃말 사이 양지쪽에 있다. 가운데뜸에는 양지쪽과 음지 쪽이 있는데 이중 동쪽에 위치한 양지쪽 마을을 양달뜸이라고 하고, 중뜸에서 서 쪽에 위치한 음지쪽 마을을 음달뜸이라고 한다.

  • ● 옴팽이 [마을] : 시알들의 북쪽에 위치하며, 이곳의 지형이 움푹 패였기 때문에 이를 옴팽이 또는 움팽이라고 부른다. 옛날 이곳에 한 가구와 주막이 있었다.

  • ● 웃말(계상리, 상촌) [마을] : 가운데뜸에서 남쪽에 있는 마을로, 계수 위쪽에 마을 이 있다하여 이를 윗말 또는 웃말이라고 부르며 또 계상리라고도 한다. 이 웃말 도 다시 양지쪽의 마을은 양지뜸, 음지쪽의 마을은 음지뜸으로 구분된다.

  • ● 웃을미기(윗을미기) [마을] : 을미기에서 남쪽, 텃골에서 북동쪽에 있다. 지형상을미기 보다 높은 곳에 있어 이를 윗을미기라 부른다.

  • ● 을미기(여울목, 을탄) [마을] : 윗을미기의 북쪽, 산정말(신대)에서 북쪽에 있는 마을로서, 옛날에는 이 마을 앞으로 갑천의 물이 흘러서 여울이 졌었는데, 그후 큰 장마로 인하여 갑천이 서쪽으로 변경되어 흐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옛날에 여울 이 졌던 마을이라 여울목 또는 을탄이라고 하였다. 그후 변하여 을미기라고 부른다.

  • ● 잠파굴 [골] : 지수에서 회덕 방면으로 뻗은 산등성이를 따라서 첫 번째 골짜기이다.

  • ● 장고개¹[고개] : 상포정과 바위배기 사이로, 윗을미기에서 북쪽에 있다.

  • ● 장고개²[고개] : 웃뜸과 양수장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옛날에는 이 고개를 이용하여 장에 다녔으므로 이를 장고개라고 불렀다.

  • ● 장고개³[고개] 을미기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옛날에는 이 고개 동쪽에 사는 사람들이 장을 보러 이 고개를 넘어 다녔다고 한다. 이 고개 아래의 마을이름도 장고개 마을이다. 약 100년전 신대리들에 장이 섰었다.

  • ● 중뜸(중말, 중촌) [마을] : 윗뜸에는 동쪽에 양지뜸이, 서쪽에 음지뜸이 있는데, 양 지뜸과 음지뜸 사이에 마을이 있으므로 이를 중뜸이라고 부른다.

  • ● 지네울(지네굴) [골] : 비성굴 옆에 있는 골짜기로, 지네가 많다고 하여 지네울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 ● 텃골 [골] : 윗을미기와 산정말 사이로, 지형 상 산이 안으로 굽어 들어가 있어 텃골이라 한다.

  • ● 푯대결(푯대거리) [들] : 텃골에서 서쪽, 시알들 가운데에 있다. 갑천제방을 쌓을 때, 이곳에 측량 푯대를 세웠기 때문에 푯대거리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