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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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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19-04-25 11:58 조회36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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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_arrow.gif신일동(新一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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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일동의 입지와 자연환경
신일동은 지리적으로 대덕구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덕암동(德岩洞)과 상서동(上書洞), 남쪽은 유성구 용산동과 탑립동(塔立洞), 서쪽은 유성구 관평동(官坪洞), 북쪽은 문평동(文坪洞)과 목상동에 인접해 있다. 예전에는 서쪽으로 낮으막한 산을 두르고 그 밑으로부터 목상동까지 넓은 들이 인접한 곳이 신일동인데, 새터의 뜻인 신대가 변해서 신일동(新一洞)이 되었으며 산 아래 구릉을 중심으로 남북쪽 자연마을들이 잘 발달되었던 곳이다. 

목상동 관할의 세 개동 가운데 산과 들 내가 함께 어우러진 마을이 신일동이다. 따라서 이곳에는 동쪽으로 상포정, 팔동배산, 매봉재, 바위백이 등의 산이 있어, 서당골, 비성굴, 지네울, 뎟골, 잠파굴, 자자굴 등의 골짜기와 장고개들이 있으며 서쪽과 북서쪽으로 시알들, 성어마루들, 푯길, 국계날맹이 등의 들과 을미기방죽의 연못, 구멍수렁이라는 내와 네거리가 있다. 따라서 산밑과 들가운데는 여러 개의 마을들이 형성되었으니, 을미기, 윗을미기, 산정말, 옴팽이, 웃말, 중뜸, 가운데뜸, 양달뜸, 말동배, 가경재, 구장터 등이 그것이다.


현재의 신일동은 주로 남북으로 뻗은 야산을 배경으로 서쪽으로 발달한 지역으로 주거 밀집지역과 제3·4 산업단지가 들어서 있는데 입주 업체로는 한라공조·신호제지·삼양사 등이 있다.

현재 신일동의 토지지목별 현황을 대덕구청에서 발행한『'99통계연감』에 의해 살펴보면 총 면적이 2,689,805㎡이다. 이 가운데에서 전(田)이 96,779㎡로 4%, 답(畓)이 59,098㎡로 2%, 임야가 397,805㎡로 15%, 대지가 63,403㎡로 2%, 공장용지가 1,411,260㎡로 52.5% 등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현재의 신일동은 제3·4 산업지단의 개발로 대부분 공장용지로와 임야로 되어있고, 그 중 일부가 전답과 대지로 되어 있는 전형적인 산업단지의 중심이 된 동임을 알 수 있다.



◎ 신일동의 연혁
백제 때는 우술군(雨述郡), 신라 때는 비풍군(比豊郡), 고려 초기에는 회덕현(懷德縣), 고려 현종(顯宗) 9년(1018)에는 공주목에 속한 회덕군, 명종2년(1172) 이후에는 공주목 회덕현, 조선 고종 32년(1895)에는 공주부 회덕군 북면(北面)에 소속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계상리(桂上里) 학소리(學沼里) 목중리(木中里)의 각 일부와 구즉면의 봉암리(鳳岩里) 봉산리(鳳山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신대리(新垈里)라는 이름으로 대전군 북면에 편입시켰다. 1935년 11월 1일 대전읍이 대전부로 승격됨에 따라 대덕군 북면에 편입되었고, 1973년 7월 1일 북면이 읍으로 승격됨에 따라 신탄진읍 신대리가 되었다. 1989년 대전시가 직할시로 승격되자 대전직할시 대덕구 목상동에 소속된 신일동이 되었다가, 다시 1995년 1월 1일 대전직할시가 광역시로 개칭됨에 따라 대전광역시 대덕구 목상동에 소속된 법정동이 되었다.

조선초기 태종 13년(1413)에 전국을 8도제로 개편하면서 행정구역을 서울→도→주·부·군·현→면(방·사)→리(동·촌) 체제로 편성하였다. 이에 따라 회덕은 충청우도 공주목에 속하는 종6품의 현감이 다스리는 회덕현이 되었다. 이와 같이 8도제의 실시와 더불어 소현의 병합이 이루어졌는데 이때에 유성현이 폐지되면서 그 영역이 회덕현과 진잠현에 속하게 되었다.

정조 13년(1789)의 {호구총수}에 의하면 현재의 신일동(신대)은 회덕현 근북면 신대리(新垈里 ; 1989년 이전의 신일동의 본래 지명)로 기록되어 있어, 조선 중기에 이미 신대리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고종 32년(1895) 갑오개혁으로 인한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태종 이래 482년간 실시되어오던 8도제가 폐지되고, 전국이 23부제를 실시하면서, 종래의 부·목·군·현 등의 지방행정 단위를 모두 폐합하여 336개 군을 신설하고 이를 23개의 부에 속하게 하였다. 이로서 회덕현은 공주부에 속하는 27개 군의 하나인 회덕군으로 개편되었고, 이에 따라 신일동(신대)도 회덕군 북면 신대리가 되었다. 이 당시 회덕의 구역은 기존의 회덕의 7개 면(현내면, 동면, 외남면, 내남면, 서면, 근북면, 일도면)에 공주군의 5개 면(천내면, 유등면, 탄동면, 구즉면, 산내면)과 청원군 주안면이 편입되어 이전보다 크게 행정구역이 확대되었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회덕군과 진잠군이 통합되어 대전군으로 되면서 신일동(신대)은 계상리·학소리·목중리 각 일부와 구즉면 봉암리·봉산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대전군 북면 신대리(新垈里)로 개편되었다. 1935년 11월 1일에는 대전읍이 부로 승격됨에 따라 대전부와 대덕군으로 분리되는데, 이때 신일동(신대)은 대덕군 북면 신대리가 되었다. 1973년 북면이 신탄진읍으로 승격되면서 신일동(신대)은 신탄진읍에 속하게 되었고, 1989년 1월 1일 대전직할시의 확대로 대덕군의 폐지와 동시에 대덕구가 설치되면서 신일동(신대)은 목상동에 속한 법정동이 되었다. 그러나 이때 회덕에 신대동이 이미「신대(新垈)」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고, 1개 구(區)에 2개의 신대동이 존재할 수 없다고 하여, 신탄진 지역의 신대동은 신일동으로 동명을 변경하게 되었다. 또한 신일동 지역에 대전 제3·4 산업단지가 들어서면서, 원주민들은 신탄진 부근지역과 대전 등지로 대부분 이주하였다.



◎ 신일동의 유래 및 지명
○ 신대리(을미기) : 신대리를 을미기라고도 하는데, 이와 같이 부르게 된 것은 을미기라는 뱀은 등에 붉은 점이 점점이 있는데, 신대리의 자연 촌락이 산밑을 따라 길게 늘어져 있는 것이 마치 을미기라는 뱀의 무늬와 같아 보였다고 하여, 이 마을을 을미기라고 한다. 신대리 마을에는 대략 34호 정도가 거주하였다. 을미기의 조그마한 자연 촌락으로는 장고개 마을과 승적골이 있다. 장고개 마을은 사람들이 장을 보러 넘어 다니는 고개에 마을이 위치하고 있어 장고개 마을이라 부른다. 이 마을에는 약 8호가 거주하였는데 창원황씨가 3호, 김해김씨가 2호, 경주최씨가 1호, 보성오씨가 1호 정도가 있었고, 가장 오래 전부터 세거해온 성씨는 창원황씨와 김해김씨이고 그 다음에 경주최씨와 보성오씨가 입향하였다고 한다.
승적골은 마을 뒷산에 절이 있어서 승적골이라 하였다. 이 마을에는 5∼6호 정도가 거주하였는데, 1946년 해방 다음해의 홍수 때 산사태로 3호가 물에 떠내려갔고, 그 후에는 창원황씨 1호, 은진송씨 1호와 본관을 알 수 없는 이씨 1호, 장씨 1호가 거주하였다.

○ 계담장터(구장터) : 계담장터는 산정말에서 남쪽, 지수에서 서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는 이 지역의 가축시장이었다. 경부선철도가 부설되기 전에는 계담장터에 우시장이 섰는데, 소 이외도 닭이나 여러 짐승을 사고파는 장이라 하여 이를 계담장터라 불렀다고 하며, 조선 선조 때 지평과 호조참의를 지낸 정복시가 이곳에 정자를 짓고 계담대(桂潭臺)라 이름하였고, 이후 조선 후기 고창현감을 지낸 송국사가 벼슬을 버리고 회덕에 돌아와, 계담대가 있었던 자리에, 다시 정자를 짓고 풍월정(風月亭)이라 하였는데 그의 호가 계담(桂潭)이다. 따라서 정자 명 계담과 송국사의 호가 계담으로 이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 후 계담장이 큰 장마로 인하여 장을, 신흥리로 옮겨가게 되자 이곳을 구장터라 부르게 되었다. 이 마을은 80∼90년전 이전부터 형성되어 있었지만, 가축시장이 옮겨간 후로는 1가구정도 밖에 살지 않았다.
계담 송국사는 장령공 희진(希進)의 장남으로 사계를 스승으로 우암, 동춘과 교류하였다. 고창에서 현감으로 있으면서 피폐했던 고을을 일으켜 세워 아전과 백성으로부터 모두 추앙받은 인물이다. 동헌을 모양성(고창성) 안에다 새로 짓고, 동헌에 평근이란 평이근민(平易近民)이란 뜻으로 정사를 까다롭지 않고 쉽게 하며 백성을 가까이하겠다는 공의 목민철학에서 나온 것이다.


◎ 신일동의 세거성씨
신일동에는 집성촌을 이룬 동족 부락은 없었고, 각성받이다. 세거 성씨로는 신대리(을미기)에는 계담대를 건립하고 이 마을에서 거주한 조선 중기의 문신 정복시이다 그의 본관은 동래로 입향 사유나 시기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이곳에서 세거하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도 그의 자손들이 회덕에 많이 퍼져 살고 있다. 그 외에도 창원황씨와 김해김씨가 이곳에서 오랫동안 세거 해왔다고 하나 정확한 입향 사유나 시기는 알 수 없다.

◎ 신일동의 옛 지명

● 가운데뜸 [마을] : 산정마을과 웃말 사이에 있다. 산정마을에서 남쪽에, 웃말에서 북쪽에 있으므로 이를 가운데뜸이라고 부른다. 이 가운데뜸은 다시 양달뜸과 음달뜸으로 구분한다.

● 가작굴(가잿굴) [골] : 웃뜸과 양수장 사이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 골짜기에 가재가 많아서 가잿골 또는 가작굴이라 부른다.

● 구렁수멍(구름수멍) [내] : 산정마을에서 서쪽에 있는 냇가로, 동쪽의 지수골과 웃뜸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이곳을 지나 갑천으로 빠진다.

● 국계날맹이 [들] : 장고개에서 서남쪽, 텃골의 북쪽에 있는 들을 말한다. 들 중에 제일 높은 지역을 국계라 하는데, 물이 채워지지 않아서 날망이라 하였다.

● 굼벙뜰 : 푯대거리에서 북쪽에 있다. 시알들 전체에서 가장 낮아서 물이 둠벙 마냥 있었고, 이곳에 물방앗간이 있었다.

● 네거리 [거리] : 산정마을과 가운데 뜸 사이에 있다. 윗지수와 말동배, 산정마을과 가운데뜸이 교차되는 사거리로 이를 네거리라고 부른다.

● 말동배(맛동배) [마을] : 산정마을에서 남쪽, 가운데 뜸에서 서쪽에 있다. 옛날에 이곳에는 소(牛)시장이 있었는데, 큰 장마로 인하여 신흥리로 옮겨가고 지금은 몇 가구의 마을이 있다. 계담장터와 말동배는 말둥배산 밑에 있는 마을로 두 지역이 가축시장이었다. 말동배는 소 시장이고, 계담장터는 소 이외 닭이나 기타 짐승을 취급하는 가축시장이었다. 말동배 마을에는 창원황씨 2호, 원주변씨 2호, 본관을 알 수 없는 유씨 2호, 이씨 3호, 박씨 등과 약간의 각성들이 거주한 마을이다.

● 바위백이 [바위] : 장고개 뒷산, 윗을미기에서 남동쪽에 있다. 신일동과 상서동, 덕암동과 경계가 되는 이 산 능선에는 여러 개의 바위가 박혀 있는데 이를 바위 백이라고 부른다.

● 비성굴 [골] : 삼파굴의 남쪽에 있었던 골짜기인데 지금은 경부고속도로가 나면서 없어졌다.

● 방죽거리다리 : 방죽에서 남쪽으로 있는 다리이다.

● 산정말(계수, 지수, 새터, 신대, 산정촌山井村) : 가운데뜸에서 북서쪽, 텃골에서 남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이 마을 뒤에 매봉재가 있는데 달이 떠오를 때 이곳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보면 달이 부락을 비추는 경관이 마치 물같이 흘러가는 형국이라서 계수 또는 지수라고 부른다. 또한 산 한가운데에 샘(井)같이 생긴 부락이 있다하여 산정말이라고 부른다. 또 옛날에는 갑천(甲川)이 마을의 앞으로 흐르므로 지수라고도 하며 옛날에는 산정말을 새터 또는 신대(新垈)라고도 불렀다.

● 상포정 [산] : 을미기 마을에서 동쪽에 있는 산을 가리킨다. 이 근처에서는 제일 높은 산이며, 말동배 마을의 위쪽에 있는 산이다.

● 성에마루(성어마루) [들] : 푯대거리에서 북쪽에 위치한다. 시알들에서 지대가 제 일 높은 들로써 옛날에 한 가구와 주막집이 있었는데 홍수로 떠내려갔다.

● 시알들(새일들) [들] : 장고개에서 서쪽에 있는 들로 서쪽으로는 갑천, 북쪽은 3공 단 앞, 남쪽으로는 말동배와 인접된 매우 넓은 들이다. 이곳에 무를 재배하였는데 가장 맛이 좋았다고 하며, 임금님께 올리는 진상품이었다고 한다. 시알들 안에는 성마루·푯대거리·계담장터·구렁수멍·삼거리·옴팽이·농막 등이 있다. 현 재는 3·4공단이 자리하고 있다.

● 신대저수지(을미기방죽) [못] : 시알들의 북동쪽, 을미기에서 북서쪽에 있다. 일제시대 때에는 잉어를 키우는 양어장이었으며 그 후에 저수지가 되었으며, 수초가 자랐고, 마름이 많았다 한다. 현재는 쓰레기가 매립된 터로 을미기공원이 되었고, 신대리에 있었기 때문에 신대저수지 라고 불렀다. 또 을미기 마을 앞에 있었기 때문에 을미기 방죽이라고도 하였다. 방죽의 둘레는 축구장 넓이 정도였으며, 문평, 들말, 시알들에 저수지 물을 이용하여 농사를 지었다 한다.

● 양달뜸 [마을] : 산정말과 웃말 사이 양지쪽에 있다. 가운데뜸에는 양지쪽과 음지 쪽이 있는데 이중 동쪽에 위치한 양지쪽 마을을 양달뜸이라고 하고, 중뜸에서 서쪽에 위치한 음지쪽 마을을 음달뜸이라고 한다.

● 옴팽이 [마을] : 시알들의 북쪽에 위치하며, 이곳의 지형이 움푹 패였기 때문에 이를 옴팽이 또는 움팽이라고 부른다. 옛날 이곳에 한 가구와 주막이 있었다.

● 웃말(계상리, 상촌) [마을] : 가운데뜸에서 남쪽에 있는 마을로, 계수 위쪽에 마을이 있다 하여 이를 윗말 또는 웃말이라고 부르며 또 계상리라고도 한다. 이웃말 도 다시 양지쪽의 마을은 양지뜸, 음지쪽의 마을은 음지뜸으로 구분된다.

● 윗을미기 [마을] : 을미기에서 남쪽, 텃골에서 북동쪽에 있다. 지형상을미기 보다 높은 곳에 있어 이를 윗을미기라 부른다. 또는 웃을미기라고도 부른다.

● 을미기(여울목, 을탄) [마을] : 윗을미기의 북쪽, 산정말(신대)에서 북쪽에 있는 마을로서, 옛날에는 이 마을 앞으로 갑천의 물이 흘러서 여울이 졌었는데, 그 후 큰 장마로 인하여 갑천이 서쪽으로 변경되어 흐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옛날에 여울 이 졌던 마을이라 여울목 또는 을탄이라고 하였다. 그 후 변하여 을미기라고 부른다.

● 잠파굴 [골] : 지수에서 회덕 방면으로 뻗은 산등성이를 따라서 첫 번째 골짜기이다.

● 장고개[고개] : 상포정과 바위배기 사이로, 윗을미기에서 북쪽에 있다.

● 장고개[고개] : 웃뜸과 양수장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옛날에는 이 고개를 이용하여 장에 다녔으므로 이를 장고개라고 불렀다.

● 장고개[고개] 을미기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옛날에는 이 고개 동쪽에 사는 사람들이 장을 보러 이 고개를 넘어 다녔다고 한다. 이 고개 아래의 마을 이름도 장고개 마을이다. 약 100년전 신대리들에 장이 섰었다.

● 중뜸(중말, 중촌) [마을] : 윗뜸에는 동쪽에 양지뜸이, 서쪽에 음지뜸이 있는데, 양 지뜸과 음지뜸 사이에 마을이 있으므로 이를 중뜸이라고 부른다.

● 지네울(지네굴) [골] : 비성굴 옆에 있는 골짜기로, 지네가 많다고 하여 지네울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 텃골 [골] : 윗을미기와 산정말 사이로, 지형 상 산이 안으로 굽어 들어가 있어 텃골이라 한다.

● 푯대결(푯대거리) [들] : 텃골에서 서쪽, 시알들 가운데에 있다. 갑천제방을 쌓을 때, 이곳에 측량 푯대를 세웠기 때문에 푯대거리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