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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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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19-04-25 13:09 조회1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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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_arrow.gif덕암동(德岩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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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암동의 입지와 자연환경
  • 덕암동은 지리적으로 대덕구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평촌동과 남쪽은 상서동, 서쪽은 목상동과 신일동, 북쪽은 석봉동과 인접해 있는 동(洞)이다. 덕암이란 지명은 옛날 한 노승의 일화에서 유래되었다. 노승은 이곳에 덕암사라는 절을 짓고 도를 닦으며 마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는데, 그 노승이 죽자 절 뒷편에서 바위가 솟았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이 바위를 덕바위라 하며 숭상하였으므로, 마을의 이름도 덕바위로 불리다가 이것이 변하여 덤바위 또는 덕암이라고 하였다.

예전의 덕암동 지역은 니동·덕운리·덕암리·석봉리·목하리·구즉면 가작리 등의 각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이곳에는 소규모의 자연촌락이 잘 발달하여 있었다. 이 가운데 덕암동 가작골 지역은 1946년 대 홍수 때 문평동 지역의 주민이 대거 이주하여 새로이 형성된 마을이다. 예전의 덕암동 지역은 소규모의 자연촌락이 발달하였는데, 이러한 촌락들은 대체로 특정 성씨를 중심으로 하는 집성촌이었다.

덕암동 지역은 1970년 이전에는 주로 밭이 많아 밭농사를 많이 하였고, 일부 논농사를 하였던 지역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신탄진 지역의 도시권이 점차 신장되자 주거지역의 확보하기 위하여 구획정리가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구획정리로 덕암동은 북쪽의 석봉동과 연결되어 도시화하였다. 이 과정에서 옛 마을들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현재의 덕암동은 1904년 경부선철도의 준공으로 평촌동·상서동 지역과 철도를 경계로 양분되었고, 1970년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신일동·목상동 지역과 양분되었다. 이로서 덕암동은 경부선철도와 경부고속도로가 신탄진을 남북으로 관통하면서 그 사이에 위치하게 되었다. 현재는 주거지역으로 변신과 함께 각종 학교 및 행정기관으로 우체국·파출소 등 관공서와 새일초등학교·신탄진중학교·중앙중학교 등의 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새로 구획 정리된 택지에는 대규모의 아파트 및 각종 빌라·단독주택 등의 주거시설이 위치하고 있다. 주거시설로는 다른 지역과 달리 중소규모의 각종 빌라 형태의 건물이 매우 많이 건설된 것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회덕·신탄진의 다른 동과는 달리 공장은 하나도 없는 상업지역과 순수한 택지로 구성되어 있는 것도 특징적이다. 따라서 현재의 덕암동에서 더 이상 옛 덕암동의 마을정경은 찾아 볼 수 없다.

현재 덕암동의 토지이용을 보면 총 1,213,119㎡에 전(田)이 67,2674㎡로 5%, 답(畓) 74,195㎡로 6%, 임야가 240,3328㎡로 20%, 대지가 439,690㎡로 36%, 학교용지가 38,909㎡로 3%, 도로가 291,900㎡로 24% 등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덕암동이 전체토지 가운데, 도로 점유율이 매우 높게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덕암동에 경부고속도로가 통과하고 있고, 현재 덕암동 전체의 대부분이 도시화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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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암동의 연혁
  • 덕암동 지역은 백제 때는 우술군이었다가, 신라시대에는 비풍군으로 개명하였고, 그 밑에 유성현과 적오현(뒤에 덕진현)을 그 속현으로 두었다. 고려초기에는 비풍군을 회덕현으로 읍호를 바꾸었고, 이후 고려 현종 9년(1018)에는 공주의 속현으로 귀속되었다. 그런데 고려시대 유성현과 덕진현이 공주의 속현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 현종 9년의 군·현의 개편시에 유성현과 덕진현이 회덕의 속현에서 벗어나 공주의 속현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후 회덕현은 고려 명종 2년(1172)에 처음으로 감무(조선초기의 현감과 같음)를 두게 되어 주현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조선초기 태종 13년(1413)에 전국을 8도제로 개편하면서 행정구역을 서울→도→주·부·군·현→면(방·사)→리(동·촌) 체제로 편성하였다. 이에 따라 회덕은 충청우도 공주목에 속하는 종6품의 현감이 다스리는 회덕현이 되었다. 이와 같이 8도제의 실시와 더불어 소현의 병합이 이루어졌는데 이 때에 유성현이 폐지되면서 그 영역이 회덕현과 진잠현에 속하게 되었다.

정조 13년(1789)의 『호구총수』에 의하면 현재의 덕암동은 회덕군 근북면 덕암리로 기록되어 있어 조선중기에 이미 덕암리라는 행정구역과 지명이 존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후기 고종 32년(1895) 갑오개혁으로 인한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태종이래 482년간 실시되었던 8도제가 폐지되고, 전국이 23부제로 실시하면서, 종래의 부·목·군·현 등의 지방행정 단위를 모두 폐합하여 336개 군을 신설하여 이를 23개의 부에 속하게 하였다. 이로서 회덕현은 공주부에 속하는 27개 군의 하나인 회덕군으로 개편되었고, 덕암동도 회덕군 북면 덕암리가 되었다. 이 당시 회덕의 구역은 기존의 회덕의 7개 면(현내면, 동면, 외남면, 내남면, 서면, 근북면, 일도면)에 공주군의 5개 면(천내면, 유등면, 탄동면, 구즉면, 산내면)과 청원군 주안면이 편입되어 이전보다 크게 행정구역이 확대되었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회덕군과 진잠군이 통합되어 대전군이 되면서 니동·덕운리·덕암리·석봉리·목하리·구즉면 가작리 각 지역의 일부가 합하여져 대전군 북면 덕암리가 되었다. 1935년 11월 1일에는 대전읍이 부로 승격됨에 따라 대전부와 대덕군으로 분리되는데, 이때 덕암동은 대덕군 북면 덕암리가 되었다. 1973년 북면이 신탄진읍으로 승격되면서 덕암리는 신탄진읍에 속한 대덕군 신탄진읍 덕암리가 되었다가, 1989년 1월 1일 대전직할시의 확대로 대덕군의 폐지와 동시에 대덕구가 설치되면서 덕암동은 행정동이자 법정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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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암동의 전통마을과 씨족
  • ○ 산정마을(산정말) : 진구레에서 동쪽으로, 현재의 덕암주공아파트와 동방개발 사이가 된다. 지형상 마을이 산꼭대기에 있다해서, 이를 산정마을 또는 산정말이라고 부른다. 산정마을에는 은진송씨 4호 정도가 거주하였다.

○ 새뜸(신촌 新村) : 서가작골과 덕암교 사이에 있다. 가작골(동가작골)에서 서쪽에 망골천 건너에 새로 생긴 마을이다. 1946년 큰 장마로 인하여 문평리 주민들이 집을 잃고 이곳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마을을 형성하였기에, 이를 새뜸이라 부른다. 새로 생긴 마을이라 여러 성씨들이 모여 살게 되었고, 특별히 이곳에 주도적인 성씨나 이들 이전에 거주하였던 원주민은 없었다.

○ 서가작골(서가작곡) : 덕암교와 진구레 사이의 마을이다. 석봉동 가작골에서 서쪽에 있어 서가작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서가작골 마을은 산을 깎아서 마을을 형성하였다. 또 가작골 동쪽에 있는 마을은 동가작골이라고 부른다. 이 마을은 이전에는 반남박씨들이 4∼5호가 거주하였던, 반남박씨의 집성촌이었다. 현재 이곳에는 석문아파트 등이 들어서 있다.

○ 진구레(징구레, 니동, 운평) : 중앙중학교에서 서남쪽에 있다. 서가작골과 도장골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는 비가 오면 진흙이 많아 땅이 몹시 질었다하여 진구레라고 불렀다. 또 이 마을에는 조선 정조 때 학자인 운평 송능상이 살았는데 송능상의 호가 운평이었던 연유는 이곳의 지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예전에 진구레마을은 연산서씨들이 약 15호 정도 집단으로 거주하였던 연산서씨 집성촌이었다. 현재 중앙중학교가 있는 지역이 옛 진구레마을 있었던 곳이다.

○ 도장골 : 덤바위와 진구레 사이에 있었던 마을로, 현재의 경부고속도로 신탄진 매표소에서 바로 남쪽에 있었던 마을이다. 옛날에는 지금의 경부고속도로 서쪽에 산으로 두르고 동쪽으로 앝으막한 골짜기를 이룬 곳에 위치하였던 마을이다. 현재는 경부고속도로 신탄진 매표소 등이 들어서 있다. 예전에는 총 15호 정도 거주하였는데, 그 가운데 반남박씨가 7호 정도이었고, 진주강씨·연산서씨·은진송씨 등의 여러 성씨들이 약간 거주하였다.

○ 망골 : 현재의 덕암새마을금고 건너편으로 반남박씨들이 약 15호 정도 거주하였던 집성촌이다. 현재 이곳에는 유락아파트 등이 들어 서있다.

○ 덕암 : 덤바위와 진구레 위쪽으로 혹은 덕바위·원덕암으로 불리며, 반남박씨 5∼6호 정도가 거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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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암동의 세거성씨
  • ○ 반남박씨(潘南朴氏) : 반남박씨는 신라의 시조 왕 박혁거세를 유일조로 받들고 있다. 반남박씨는 고려시대 박혁거세의 혈손으로 알려진 박응주를 시조로 삼고 있으나 그 상계(上系)는 실전(失傳)되어 밝힐 수 없다. 박응주는 고려시대 반남(전라남도 나주의 속현)에서 세거하던 호족으로 호장(戶長)을 지냈고, 그의 6세손 박은이 조선초기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 태종을 도와 익대동덕좌명공신으로 좌의정에 올라 반남군에 봉해졌다가 금천부원군에 진봉되었다. 따라서 후손들이 박응주를 선조(1세)로 하고 본관을 반남으로 하고 있다.

본래 회덕에서 반남박씨가 세거한 곳은 석봉동으로 시조로부터 9세 박진의 손자인 박세영이 진주강씨 강문한의 1녀와 혼인하면서 부터이다. 덕암동의 반남박씨는 석봉동에 세거한 반남박씨들이 분촌하여 세거한 경우이다. 그런데 반남박씨가 석봉에 입향한 시기가 성종 을미(1454)에서 중종 임신년(1532)년 사이었다고 여겨지므로, 덕암동에 세거한 반남박씨는 이 보다 늦은 16세기말이나 혹은 17세기 초반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덕암동 일대에 거주하는 반남박씨는, 석봉동에 세거하였던 13세 박흥남·박형남·박인남의 후손들이다. 그리고 이들의 일부가 분촌하여 옥천으로 이주하여, 옥천지역의 반남박씨들도 석봉동의 반남박씨들과 일족이다.

○ 연산서씨(連山徐氏) : 연산서씨의 시조는 서준영으로 서신일의 후손이었는데 누대에 걸쳐 연산지방에서 세거하여 연산서씨라 하였다. 서준영에게는 아들 서보가 있었으나 그후 세계가 실전되어 후손들은 서보의 후손인 서의민을 1세조로 삼고 있다. 연산서씨는 원래는 이천서씨이었으나 분적하여 연산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연산서씨는 모두 7개 파인데 회덕에 내거한 파는 통덕랑파로 내거 이전에는 홍성군 귀황면 지정리에서 세거하였다. 현재에 이곳이 연산서씨들이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많이 세거하는 곳이라 한다. 특히 이곳에는 연산서씨와 관련하여 1853년에 족보를 오석에다 새긴 "연산서씨석보"가 있다. 현재 이 석보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64호로 지정되었다. 홍성에 세거하던 연산서씨가 회덕에 입향하게된 계기는 회덕의 입향조이었던 25세 서주세의 처가 회덕에 오랜 세거한 반남 박태교의 딸이었다. 즉 연산서씨는 처향을 따라 홍성에서 회덕으로 이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회덕에 이거한 연산서씨는 통덕랑파에서 다시 분파하여 회덕파라 하기도 한다. 연산서씨의 회덕 입향시기는 입향조 서주세의 생몰년대가 1671년(현종, 신해)에 출생하여 몰년이 1740년(영조, 경신)으로 족보상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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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암동의 옛 지명
  • ● 가작골(佳作谷, 가재골) : 진구레 북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가재처럼 생겼다 하여 가재골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가작골이라 부른다.

  • ● 덤바위(던바위, 덕암) [바위] : 새일초등학교와 경부고속도로 신탄진 매표소 중간으로 덕암우체국 서쪽에 있다. 덕암동·상서동·신일동 3동이 만나는 산봉우리가 바위배기인데, 이 봉우리에는 큰 바위가 서 있고, 이곳에서 조금 떨어져있는 곳에 작은 바위가 덤으로 서 있다하여, 덕암동에서는 이를 덤바위 또는 덕암이라 하고, 상서동에서는 선바위 또는 입암이라 한다.

  • ● 덤바위방죽(덕암저수지) [못] : 새일초등학교와 덕암우체국 사이로, 덤바위 앞에 있는 방죽으로 이를 덤 바위 방죽 또는 덕암저수지라고 부른다.

  • ● 도장골 [마을] : 덤바위와 진구래 사이, 신탄진 매표소 남쪽에 있다. 옛날에는 낮은 산골짜기에 마을이 있었지만, 현재는 구획정리 사업으로 옛 모습은 없다.

  • ● 도장들 [들] : 덤바위와 도장골 사이에 있는 들이다. 도장골에서 남동쪽에 들이 있어 도장들이라 부른다. 현재는 구획정리 사업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 ● 망골천 [내] : 석봉동과 덕암동 사이에 있는 개천으로, 석봉동 망골에 냇가가 있어 망골천이라 부른다.

  • ● 바우배기(바위배기) [산] : 새일초등학교에서 북서쪽에 위치한 산으로 산에 바위가 박혀있다 하여 바우배기라 부른다.

  • ● 산정말(산정마을) [마을] : 진구레에서 동쪽, 현재는 주공아파트와 동방개발 사이가 된다. 지형 상 산꼭대기에 마을이 있다하여, 산정마을, 산정말이라고 부른다.

  • ● 새뜸(신촌) [마을] : 가작골(동가작골)에서 서쪽으로, 망골천 건너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뜸이라 부른다. 1946년 큰 장마로 인하여 문평리 주민들이 집을 잃고 이곳에 새로이 형성된 마을이다.

  • ● 서가작골(서가작곡) [마을] : 석봉동 가작골에서 서쪽에 있으므로, 이를 서가작 골이라고 부른다. 산을 깎아서 마을을 형성하였다. 또 가작골 동쪽에 있는 마을을 동가작골이라고 부른다.

  • ● 장고개 [고개] : 신일동과 덕암동의 경계로써, 바위배기에서 북쪽 산등성에 있다. 덕암동에서 문평동으로 장을 보러 넘어 다니던 고개라서 장고개라 한다.

  • ● 진구레(징구레, 니동, 운평) [마을] : 중앙중학교에서 서남쪽에 있다. 서가작골과 도장골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땅이 몹시 질어 진구레라 하였고, 또한 이 마을에서 조선 정조 때 학자 운평 송능상이 살았다 하여 운평이라고도 부른다.

  • ● 가경재 : 가경재는 산정말의 앞산부리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나 지금이나 덕암동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