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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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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19-04-25 13:23 조회1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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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_arrow.gif황호동(黃湖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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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동의 입지와 자연환경
  • 황호동은 지리적으로 대덕구의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과 북쪽으로는 충북 청원군 문의면, 서쪽은 미호동, 남쪽은 부수동이 인접한 동(洞)이다. 황호동은 금강이 남쪽에서 동쪽으로 다시 서쪽으로 흘러가면서 곶을 이루었다 하여, 느루꾸지·느릅고지·황곶·황호라 하였다.

  • 황호동의 자연마을은 누루꾸지·서당골(한정)·지락이(지명이)·형지원(성지원)·양지말·음지말(감나무골)·너멍골 등이 있었으나 모두 대청댐으로 인하여 수몰되었다. 따라서 현재의 황호동은 대청호 상에 조그마한 무인도로 만 남아 있다.

옛 황호동에 있었던 누루꾸지는 형지원 동북쪽, 황호동에서 가장 북쪽에 있던 마을이다. 금강이 남쪽에서 동쪽으로, 다시 서쪽으로 흘러가 곶을 이루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금강변에 자리하여 맑은 물과 들이 조화를 이루어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누루꾸지는 누룻구지·누룹꾸지·느루꾸지·느룹꾸지·느릅고지 ·황곶·황호·원황호 등으로도 부른다.

서당골은 형지원 남쪽, 서당골 내의 북쪽에 있던 마을이다. 옛날에 이곳에 서당이 있었다 하여 서당골이라 한다. 지락이는 지명산(지락산) 동쪽 아래, 형지원 서북쪽, 누루꾸지 서남쪽에 있던 마을이다. 지락이 북쪽 끝에 지락(지명)장이 크게 섰었는데, 그 이름을 따서 지락산(지명산)이라 했고, 마을 이름도 지락이라 했다. 또는 큰 시장이 섰던 곳으로 유명하다 하여 지명(地名)이었던 것이 지명(芝茗)이 되었다고도 한다. 한정은 형지원 남쪽, 서당골 북쪽에 있던 마을이다. 세종 갑신년에 문과에 급제한 호가 안한정인 선비가 살았다 하여 한정이라 하였다. 형지원은 누루꾸지 서남쪽, 지명이 남쪽, 서당골 북쪽에 있던 마을이다. 옛날에 이 곳에 행인들의 편의를 도와주는 관가인 형지원이 있어, 마을 이름을 형지원이라 했다. 황호동의 총 면적은 2,632,896㎡로 이중 전(田)이 21,060㎡로 0.7%, 답(畓)이 1,917㎡로 0.07%, 임야가 692,121㎡로 26%, 유지(집 있던 자리)가 1,917,798㎡로 73%로 구성되어 있다.

황호동의 연혁
  • 황호동의 지역은 백제 때는 우술군이었다가, 신라시대에는 비풍군으로 개명하였고, 그 밑에 유성현과 적오현(뒤에 덕진현)을 그 속현으로 두었다. 고려초기에는 비풍군을 회덕현으로 읍호를 바꾸었고, 이후 고려 현종 9년(1018)에는 공주의 속현으로 귀속되었다. 그런데 고려시대 유성현과 덕진현이 공주의 속현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현종 9년의 군·현의 개편시에 유성현과 덕진현이 회덕의 속현에서 벗어나 공주의 속현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후 회덕현은 고려 명종 2년(1172)에 처음으로 감무(조선시대의 현감과 같음)를 두게 되어 주현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 조선초기 태종 13년(1413)에 전국을 8도제로 개편하면서 행정구역을 서울→도→주·부·군·현→면(방·사)→리(동·촌) 체제로 편성하였다. 이에 따라 회덕은 충청우도 공주목에 속하는 종6품의 현감이 다스리는 회덕현이 되었다. 이와 같이 8도제의 실시와 더불어 소현의 병합이 이루어졌는데, 이 때에 유성현이 폐지되면서 그 영역이 회덕현과 진잠현에 속하게 되었다.

정조 13년(1789)의 {호구총수}에 회덕현 일도면 지역에 있어야할 황호리의 지명이 기록되지 않았다. 다만 후에 황호리에 속하게된 형지원리의 지명만은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정조 13년 당시에는 황호리라는 행정구역이 없었거나, 아니면 다른 지명으로 존재하였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조선후기 고종 32년(1895) 갑오개혁으로 인한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태종이래 482년간 실시되었던 8도제가 폐지되고 전국이 23부제를 실시하면서, 종래의 부·목·군·현 등의 지방행정 단위를 모두 폐합하여, 336개 군을 신설하고 이를 23개 부에 속하게 하였다. 이로서 회덕현은 공주부에 속하는 27개 군의 하나인 회덕군으로 개편되었고, 황호동은 회덕군 일도면 황호리가 되었다. 이 당시 회덕의 구역은 기존의 회덕 7개 면(현내면, 동면, 외남면, 내남면, 서면, 근북면, 일도면)에 공주군 5개 면(천내면, 유등면, 탄동면, 구즉면, 산내면)과 청원군 주안면을 편입하여 이전보다 크게 행정구역이 확대되었다.

1914년에는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회덕군과 진잠군이 통합되어 대전군으로 되면서 황호리는 황호리·지명리·서당리·형지원 각 일부가 합하여져, 대전군 북면 황호리로 개편되었다. 1935년 11월 1일에는 대전읍이 부로 승격됨에 따라 대전부와 대덕군이 분리되었는데, 이때 황호동은 대덕군 북면 황호리가 되었다. 그후 1973년 북면이 신탄진읍으로 승격되면서 황호리는 신탄진읍에 속하게 되었고, 1989년 1월 1일 대전직할시의 지역확대로 대덕군의 폐지와 동시에, 대덕구가 설치되면서 황호동은 신탄진동에 소속된 법정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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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동의 전통마을과 씨족
  • ○ 누루꾸지(누룻구지, 누룹꾸지, 느루꾸지, 황곶, 황호, 원황호) : 형지원 동북쪽, 황호동의 가장 북쪽에 있던 마을로, 대청댐으로 인해 수몰되었다. 금강이 남쪽에서 동쪽으로, 다시 서쪽으로 흘러가 곶(반도)을 이루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금강 변에 자리해서 맑은 물과 들이 조화를 이루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에는 총 30호 정도 세거하였는데 이 가운데 경주김씨가 대성으로 20호 되었고, 기타는 각성들이 거주하였다.

○ 서당골(한정마을) : 형지원 남쪽에 있던 마을인데 대청댐으로 인해 수몰되었다. 옛날에 곡산연씨의 자손들을 가르치기 위해 문중에서 세운 서당이 있어 서당골이라 했다. 서당골 마을 뒤에는 안한정이란 정자가 있었다. 그래서 이곳을 한정마을이라고도 부른다. 안한정은 정자를 세운 곡산연씨 장령공의 호가 안한정이어서 정자의 이름도 안한정이라 하였다. 대청댐 건설로 이 지역이 수몰되어 안한정은 충북 청원군 현도면 노산리에 이전하였다. 서당골(한정마을)에는 총 22~23호 정도가 세거하였는데, 타성은 거주하지 않고 곡산연씨만 살던 곡산연씨 집성촌이었다.

○ 형지원(성지원) : 누루꾸지의 서남쪽, 지명이 남쪽, 서당골의 북쪽에 있던 마을로 형지원 내에는 양지말과 음지말로 나뉘는데, 양지말은 음지말 서쪽 건너마을로 총24호가 세거하였는데 곡산연씨 집성촌이었다. 음지말(감나무골)은 양지말 동쪽 건너마을로 총18호가 세거하였고 이중 곡산연씨가 14호, 타성이 4호 거주하였는데 1호는 광산김씨로 연씨의 외손이었다.
너멍골은 음지말 서쪽건너편, 양지말 북쪽에 위치한 마을인데 총 6호중 1호는 연씨사위인 남원양씨가 거주하였다.
형지원은 옛날에 이곳에 행인들의 편의를 도와주던 관가인 형지원이 있어서 마을 이름을 형지원이라 했다. 이후 대청댐 건설로 인해 수몰되었다.  

황호동의 세거성씨
  • ○ 곡산연씨(谷山延氏) : 곡산연씨의 시조는 연수창으로 본래는 중국인이었으나 고려말 원나라의 공주를 배종래조(陪從來朝)하였다가 곡산에 정착하여 세거하였다 한다. 그리고 황호에 입향한 곡산연씨는 입향조이었던 연정설의 처가 충북 청원군 현도면 노산의 진주유씨 유종식 딸이어서 처향을 따라 입향하게 된 것이라 한다. 입향 시기는 연정설의 생년이 1431년(세종 13)이고 몰년이 1511년(중종 6)이었음을 볼 때 15세기 전반에서 16세기 초반이라 짐작된다. 곡산연씨는 회덕의 사족으로 조선 중기까지 활발히 활동하였다. 그러한 사실로 1672년 중수된 {회덕향안}에 곡산연씨들이 다수가 입록되어 있는 등 사족적 기반이 매우 강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황호동의 옛 지명
  • ● 가장골 [골짜기] : 산이 단정하고 아름답다하여 가장골인데 가장골이라고도 부른다. 댐건설로 수몰되고 일부만 남아있다.

  • ● 가재골 [골짜기] : 누루꾸지 남쪽, 금강 우측골짜기 형지원 동쪽 산너머인데 이곳에 가재가 많다하여 가재골이다. 댐건설로 수몰되었다.

  • ● 구렛샘 [우물] : 음지말 서쪽, 앞들에 있는 샘으로 겨울에도 따뜻한 물이 솟아 빨래터로 사용하던 샘이다. 아랫구래 마을의 수원이었는데 댐건설로 수몰되었다.

  • ● 귀신바위(구신바우, 귀신암) [바위] : 지명산 동쪽 산기슭에 있는 바위이다. 지락이 북쪽 산모퉁이의 길이 후미지고, 바위가 많고 굴이 있는데 밤에 귀신이 나와 사람을 홀렸다고 해서 귀신바위라 하였다. 대청댐으로 인해 수몰되었다.

  • ● 꽃밭골 [골짜기] : 서당골 남쪽, 부수골 너머 가는 양쪽 골짜기에 봄이면 진달래, 철죽 등이 가을이면 국화 등 각종 꽃들이 만발하는 곳으로 꽃밭골이라 부른다.

  • ● 너멍골 [마을] : 양지마을 북쪽, 음지말 서북쪽에 위치한 형지원내의 마을로 빈장을 넘어가는 고개 골짜기에 있어 너멍골이라 하였다. 댐건설로 인해 수몰되었다.

  • ● 누루꾸지(느루꾸지, 느룹꾸지, 느릅고지, 황곶, 황호, 원황호) [마을] : 형지원의 동북쪽, 황호동의 가장 북쪽에 있던 마을로 대청댐으로 인해 수몰되고 일부만 무인도로 남아있다. 금강이 남쪽에서 동쪽으로, 다시 서쪽으로 흘러가 곶을 이루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금강 변에 자리해서 맑은 물과 들이 조화를 이루어 붙여진 이름이다.

  • ● 누루꾸지나루터(누룻구지나루터, 느릅고지나루, 황호나루, 황호진) [나루] : 누루꾸지 마을 앞에 있던 나루터로, 누루꾸지 마을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청주 감영의 검문이 심했던 나루터이다. 대청댐으로 인해 수몰되었다.

  • ● 다리막골 [골짜기] : 누룩꾸지 서쪽, 돌마루길 남쪽에 위치한 골짜기로 사람이 다리를 펴고 앉은 모습과 비슷하다고 하여 다리막골이다. 댐건설로 일부분이 수몰되었다.

  • ● 다발골 [들] : 음지말 동북쪽, 지명이 동남쪽에 위치한 들인데 논보다는 밭이 많다하여 다밭골이라 불리었는데 1960년대 양수시설로인해 일부가 논으로 바뀌었다가 댐건설로 수몰되었다.

  • ● 뒷동산 [산] : 음지말 동북쪽 작은 산인데 마을 뒤쪽에 있다하여 뒷동산이다. 댐건설로 수몰되었다.

  • ● 돌마루 [고개] : 지명이 동쪽, 누룩구지 서쪽으로 귀신바위를 안고 도는 고개길인데 산에 돌이 많다하여 돌마루라 부른다. 댐건설로 수몰되었다.

  • ● 대죽봉 [산] : 양지말 서북쪽, 너멍골 남쪽에 위치한 산인데 대나무가 많아 대죽봉이라 하였다. 댐건설로 수몰되었다.

  • ● 대추봉 [산] : 지락이 마을 바로 남쪽에 있는 대추처럼 작은 산봉우리였으나, 대청댐으로 인해 수몰되었다.

  • ● 물넘어 [길] : 지명이 동쪽, 누루꾸지로 가는 길이고, 아래말 서북 쪽에서로 금강으로 가는 길인데 여름 장마철에 물이 이곳까지 넘쳐흘러 왔다고 하여 물넘어 이다. 댐건설로 수몰되었다.

  • ● 부수골 보호수 [나무] : 성치산 아래 서당골에서 부수골(경계) 고개에 있는 500여년된 느티나무 보호수로 현재에도 유일하게 남아있는데, 음지말에 살던 연세호씨가 1998년 이곳에 제단을 설치하고 수몰지구 실향민들과 함께 거리제를 지내오고 있다.

  • ● 볼깅이 : 서당골 서쪽 마을입구로 나가면 산모퉁이가 있는데 웅덩이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하여 봉깅이다. 댐건설로 수몰되었다.

  • ● 봉천지기 [들] : 음지말 북쪽, 지명이 동남쪽에 위치한 들인데 비가오지 않으면 벼농사를 짓지 못할 정도로 농업용수 사정이 어려운 들로 1960년대 양수시설로 비옥해졌으나 댐건설로 수몰되었다.

  • ● 비석날 [산] : 양지말 동쪽, 음지말 남쪽에 위치한 산 능선인데 곡산연씨 공조참의 묘소가 있고 형지원에 처음으로 비석이 세워져 비석날이다. 댐건설로 수몰되었다.

  • ● 빈장(빙장) [고개] : 너멍골 서쪽 넘어 산고개인데 경사가 심해 길이 미끄럽다고 빈장(빙장)이라 하였다. 댐건설로 수몰되었다.

  • ● 배고개 [고개] : 형지원 동남쪽, 배고개나루로 넘어가는 고개를 배고개라 하였는데 옛성인들이 미리 알고 붙인 명칭처럼 되었는데, 댐이 건설되고 배가 이 고개를 자유로이 넘어 다니는 곳이 되었다.

  • ● 배고개 개나루터 [나루] : 배고개 넘어 골짜기를 빠져나가면 금강인데 이곳에 나루가 있어 개나루터라 불리었다. 댐건설로 수몰되었다.

  • ● 배나무골 [골짜기] : 원앞샘 바로 남쪽에 있는 골짜기인데 배나무가 많아서 배나무골로 불리었다. 댐건설로 수몰되었다.

  • ● 산산천 : 계족산에서 시발하여 삼산 앞을 거쳐 금강하류에 합류되는 하천이 삼산천이다. 댐건설로 수몰되었다.

  • ● 서당골 [마을] : 성치산 아래, 형지원 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서당이 있어서 서당골이라 했다. 현재는 대청댐으로 인해 수몰되었다.

  • ● 서당골고개 [고개] : 서당골 북쪽, 형지원 남쪽의 안한정 바로 아래쪽에 위치한 고개로 안한정과 서당이 위치해있어 이 고개로는 상여가 넘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 ● 새터(사태) [터] : 형지원 동남쪽, 자천이 산 아래에 위치한 곳인데 새로운 터를 잡아 살았다하여 새터였으나 산사태로 인하여 이곳에 살지 못했다고 사태로 불리었다. 댐건설로 수몰되었다.

  • ● 실너골(시루골) [골짜기] : 형지원 동쪽산 너머, 가재골 남쪽 산너머 골짝은 작은실너골이고, 다음 작은 실너골 남쪽 산골짝은 큰 실너골인데 골짜기가 시루와 같다고하여 시루골(실너골)이라 부른다. 댐건설로 수몰되었지만 산꼭대기인 주봉은 남아있어 대청호의 섬이 되었다.

  • ● 아랫구래 [들] : 음지말 앞 서북쪽, 지명이 남쪽에 위치한 들인데 아랫쪽에 위치해 있다하여

  • ● 아랫말(포천들) [마을] : 음지말 동북쪽 지명이 동쪽에 위치한 들인데 이곳에 옛날에 마을이 있어 아랫말이라 하였고 포전은 마을근처 밭을 말한다. 1960년도 양수시설로 논으로 개간되었으나 댐건설로 수몰되었다.

  • ● 아안돌이 : 지명산의 금강 변에 있다. 강이 산을 안고 돌아간다 하여 아안돌이라 하였다.

  • ● 앞산 [산] : 양지말 남쪽에 위치한 산 능선인데 마을 앞에 위치하여 앞산이라 하였는데 댐건설로 수몰되었다.

  • ● 양수장 : 지명이 동쪽, 형지원 동북쪽 물넘어 고개근처에 위치해있는데 다밭골, 아랫말, 봉천지기, 원두 일부작인들의 숙원사업으로 1960년 양수시설을 하여 물을 공급하던 양수장이다. 댐건설로 수몰되었다.

  • ● 양지말 [마을] : 서당골 북쪽, 지명이 남쪽에 위치한 형지원내의 마을로 양지쪽 마을이라 하여 양지말인데 댐 건설로 수몰되었다.

  • ● 양지말 보호수 [나무] : 양지말 동쪽 마을 앞에 위치한 450년된 느티나무이다. 음력 정월 대보름 전야에 이곳에 모여 마을의 안녕과 가정의 편안을 기원하던 보호수이다. 댐건설로 수몰되었다.

  • ● 원두 [들] : 너멍골 서북쪽, 지명이 남쪽들인데 예날에 원두농사를 지어서 원두라고고도 하고, 논이 비옥해 원두의 땅을 소유하였으면 원이 없다하여 원두라고 불렀다 한다. 댐건설로 수몰되었다.

  • ● 원앞샘 [우물] : 양지말 남쪽, 마을 앞에 있는 샘으로 항상 물이 솟아나는 샘으로 윗구래의 농업용수로 사용되었다. 댐건설로 수몰되었다.

  • ● 음지말(감나무골) [마을] : 양지말 동쪽 건너편에 위치한 형지원내의 마을로 음지쪽에 자리하고 있어 음지말이고 감나무가 많아서 감나무골이라 불렀다. 댐건설로 수몰되었다.

  • ● 음지말 보호수 [나무] : 음지말 서쪽마을 입구에 있는 350여년된 느티나무로 음력 정월 대보름 전야에 마을의 안녕과 각 가정의 만사형통을 빌던 성스러운 보호수이다. 댐 건설로 수몰되었다.

  • ● 음지말 앞도랑 [개천] : 자천이 산에서 시발하여 음지말 앞을 지나 청석다리를 거쳐 금강에 합류되는 개천을 말한다. 댐건설로 수몰되었다.

  • ● 윗구래 [들] : 양지말 동남쪽에 위치한 들인데 윗쪽에 있다하여 윗구래이다. 댐건설로 수몰되었다.

  • ● 자천이 [산] : 서당골 동북쪽, 형지원 동남쪽에 있는 산인데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붉은 단풍이 곱게 물든다 하여 자천이라 불렀다.

  • ● 지락이(지명이) [마을] : 지명산(지락산) 동쪽 아래, 형지원의 서북쪽, 누루꾸지 서남쪽에 있던 마을이나 대청댐으로 인해 수몰되었다. 지락이(지명이) 북쪽 끝에 지락(지명)장이 크게 섰었는데, 그 이름을 따서 지락산(지명산)이라 했고 마을 이름도 지락이(지명이)라고 했다. 또는 큰 시장이 섰기에 이곳 장터가 유명하다 하여, 지명(地名)이었던 것이 지명(芝茗)이 되었다고 한다.

  • ● 지명나루터 [나루] : 지명산 동쪽 아래, 지명이(지락이) 북쪽에 있던 나루터로, 충북 청원군 문의면과 연결된다. 지명장터 옆에 있다고 하여 지명나루터라 하였다. 현재는 대청댐으로 인해 수몰되었다.

  • ● 지명장터 [터] : 지명이 북쪽, 지명나루터 옆에 있다. 이 부근에서 제일 큰 장터 였다고 한다. 현재는 대청댐으로 인해 수몰되었다.

  • ● 청석다리(청석교, 지명다리, 지락이다리, 지락교) [다리] : 지락이 마을 앞에 있던 다리로 옛날에는 이곳이 삼남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였기에 이 근읍(近邑)에서 의연금을 내어 청석(靑石)으로 다리를 놓았다 하여 청석다리이다. 또한 이 다리를 고쳐 놓으면 부서지고 하여, 삼남 방방곡곡 사람들이 희사로 청석을 떠다가 다리를 놓았기에 청석다리이고, 지명마을 앞에 있는 다리라서 지명다리라고도 하였다. 현재는 대청댐으로 인해 수몰되었다.

  • ● 탑거리 [길] : 다리막골 아래, 누룩꾸지 서쪽 마을입구에 600년된 느티나무 아래의 길 양쪽 편에 탑이 위치해 있어 탑거리라 부르고 누룩꾸지 마을 주민들이 탑제를 올리던 곳이다. 댐건설로 수몰되었다.

  • ● 탑거리살 : 누룩꾸지 서북쪽, 탑거리 북쪽아래 금강을 八자형으로 들노뚝을 쌓고 발을 친후 물살을 이용하여 입동 때부터 이듬해 경칩 때까지 물고기를 잡는 곳이다. 댐건설로 수몰되었다.

  • ● 피적골 [골짜기] : 배고개 넘어 우측 골짜기, 자천이 산동쪽 산넘어 골짜기인데 옛날 이곳으로 피난하였다하여 피적골로 불리었다. 댐건설로 일부분이 수몰되었다.

  • ● 형지원(성지원, 성전) [마을] : 누루꾸지 서남쪽, 지명이 마을 남쪽, 서당골 북쪽에 있던 마을이다. 옛날에 이곳에 행인들의 편의를 도와주는 관가인 형지원을 두어서, 마을 이름을 형지원이라 했다. 현재는 대청댐으로 인해 수몰되었다.


  • * 자료협조 : 수몰주민 김용구, 연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