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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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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19-04-25 13:24 조회10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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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_arrow.gif삼정동(三政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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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정동의 입지와 자연환경
  • 삼정동은 지리적으로 대덕구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대청호, 서쪽은 용호동, 남쪽은 갈전동, 북쪽으로는 미호동 그리고 서북쪽은 충북 현도면과 접해 있는 동(洞)이다.

삼정동은 행정구역상 1구·2구·3구로 나뉘어져 있으며, 마을의 자연촌락으로는 강촌(웃말)·이촌(넘말)·민촌(재실말·소골)·덕골 등이 있다. 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에 형성되었다. 삼정 1구에는 강씨가 많이 살았고, 2구에는 민씨·최씨·김씨 등 여러 성씨들이, 그리고 3구에는 이씨가 많이 살았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사실은 이러한 성씨들이 집성을 이루고 살았기에, 마을이름도 성씨에 맞추어 강촌(姜村)·이촌(李村)·민촌(閔村)이라고 불렀다는 점이다.

이곳 삼정은 옛날에는 큰부자도 많았고, 동네 자체가 부촌이어서 어려운 시절에도 거지가 마을에 없었으며, 대청댐으로 인한 수몰 이전에는 금강변을 따라 넓게 발달된 논과 밭이 많았다. 따라서 대청댐이 건설되어 전답이 모두 잠겼는데도, 삼정동의 이촌·강촌·민촌 마을은 산중턱에 위치하였던 관계로, 마을은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다. 현재는 이촌·강촌·민촌은 대청호수와 접하고 있어, 아름다운 호반의 풍경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최근 도시민의 접객시설로 음식점·카페 등이 난립하여, 환경파괴는 물론 미관을 해치고 있다.

삼정동은 일부 구릉에 위치한 취락을 제외하고는, 많은 가옥과 전답이 수몰되자 어쩔 수 없이 인근지역으로 이주하였다. 따라서 삼정의 주민들은 대청댐이 생기고, 대전광역시로 편입되면서 생활의 터전을 상실하자, 득보다는 오히려 피해만 보았다고 말한다. 현재 삼정동 주민들의 생계로는 수몰되지 않은 약간의 농토를 경작하고 있고, 신탄진이나 대전 등지의 직장에 다니고 있다. 삼정동의 토지이용 실태를 『'99통계연감』을 통해서 살펴보면 총 면적이 2,959,958㎡이고, 이 가운데 전(田)이 144,184㎡로 5%, 답(畓)이 82,555㎡로 3%, 임야가 1,752,461㎡로 59%, 대지가 28,308㎡로 1%, 도로가 121,437㎡로 4%, 하천이 104,849㎡로 3.5% 등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토지 이용률로 볼 때, 삼정동은 임야가 대부분이고, 전답도 8%에 불과하여 농업도 매우 미약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대지의 비율이 전체 토지의 1% 미만으로, 삼정동에 거주인구가 많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삼정동의 연혁
  • 삼정동의 지역은 백제 때는 우술군이었다가, 신라시대에는 비풍군으로 개명하였고, 그 밑에 유성현과 적오현(뒤에 덕진현)을 그 속현으로 두었다. 고려초기에는 비풍군을 회덕현으로 읍호를 바꾸었고, 이후 고려 현종 9년(1018)에는 공주의 속현으로 귀속되었다. 그런데 고려시대 유성현과 덕진현이 공주의 속현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현종 9년의 군·현의 개편시에 유성현과 덕진현이 회덕의 속현에서 벗어나 공주의 속현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후 회덕현은 고려 명종 2년(1172)에 처음으로 감무(조선시대의 현감과 같음)를 두게 되어 주현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조선초기 태종 13년(1413)에 전국을 8도제로 개편하면서 행정구역을 서울→도→주·부·군·현→면(방·사)→리(동·촌) 체제로 편성하였다. 이에 따라 회덕은 충청우도 공주목에 속하는 종6품의 현감이 다스리는 회덕현이 되었다. 이와 같이 8도제의 실시와 더불어 소현의 병합이 이루어졌는데, 이 때에 유성현이 폐지되면서 그 영역이 회덕현과 진잠현에 속하게 되었다.

정조 13년의 {호구총수}를 살펴보면 회덕현 일도면 지역에 삼정리라는 지명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1917년에 간행된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에는 회덕군 일도면에 삼정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정조 13년 이후에 회덕현 일도면에 있었던 지명 중에서 한 두개의 지명이 삼정리로 개명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와 관련하여 그러한 사정을 증명해주는 구전이 전하여 오는데, 원래 삼정동은 옛날에는 산전(山田)을 일구어 살았다하여 산전골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노승이 이 지역의 지세를 보고는‘앞으로 이 땅에서 세 정승이 나올 명당이 있다’고 예언하여 삼정골로 바뀌어 불려졌다고 한다. 이 세 혈은 천혈(天穴)·지혈(地穴)·인혈(人穴) 등인데 그 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미 천혈에는 은진송씨가 묘를 썼고, 지혈에는 여흥민씨가, 그리고 인혈에는 충주박씨가 각각 묘를 써서 모두 가문이 현창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따라서 삼정은 다른 지명으로 존재했을 것이다.

조선후기 고종 32년(1895) 갑오개혁으로 인한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태종이래 482년간 실시되었던 8도제가 폐지되고 전국이 23부제를 실시하면서, 종래의 부·목·군·현 등의 지방행정 단위를 모두 폐합하여, 336개 군을 신설하고 이를 23개 부에 속하게 하였다. 이로서 회덕현은 공주부에 속하는 27개 군의 하나인 회덕군으로 개편되었고, 삼정동은 삼정이 아닌 다른 지명으로 회덕군 일도면에 소속되었다. 이 당시 회덕의 구역은 기존의 회덕 7개 면(현내면, 동면, 외남면, 내남면, 서면, 근북면, 일도면)에 공주군 5개 면(천내면, 유등면, 탄동면, 구즉면, 산내면)과 청원군 주안면을 편입하여 이전보다 크게 행정구역이 확대되었다.

1914년에는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회덕군과 진잠군이 통합되어 대전군으로 되면서 삼정상리·삼정중리·삼정하리·산촌·용호리·갈전하리·삼산리의 각 일부가 합하여져, 대전군 일도면 삼정리로 개편되었다. 1935년에는 대전읍이 부로 승격됨에 따라 대전부와 대덕군이 분리되었는데, 이때 삼정동은 대덕군 북면 삼정리가 되었다. 그후 1973년 북면이 신탄진읍으로 승격되면서 삼정동은 신탄진읍에 속하게 되었고, 1989년 1월 1일 대전직할시의 지역확대로 대덕군의 폐지와 동시에, 대덕구가 설치되면서 삼정동은 신탄진동에 소속된 법정동이 되었다.

삼정동의 전통마을과 씨족
  • ○ 강촌(웃말, 윗말, 삼정상리) : 강촌 마을은 장바구니고개의 북쪽, 이촌의 남서쪽에 위치한 마을로, 약 400년 전부터 진주강씨들이 세거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강촌을 이촌이나 민촌, 삼정마을에 비하여 높은 지대에 있다 하여 윗말, 웃말, 삼정상리라고도 하였다. 이곳은 30호 정도의 진주강씨가 세거하였다. 또한 강촌의 동쪽 아래의 선착장 옆에 있던 개샴은 강촌 내의 부락으로, 옛날에 개를 잡던 샘이 있었다 하여 개샴인데, 3∼4호 정도가 거주하였다. 현재는 대청댐 건설로 수몰되었다.

○ 민촌(삼정상리, 재실말, 소골) : 민촌은 솟대거리의 남쪽, 소징이의 북쪽, 산소골의 동쪽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약 200년 전부터 민씨가 세거해온 마을이라 민촌이라 하며, 삼정골 위쪽에 있어서 삼정상리, 재실이 있었다고 해서 재실말이라고도 하였다. 또한 민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연부락으로 소골이 있는데, 이곳의 지형이 소가 누워있는 와우형이라서 소골·소곡·와골·와곡이라 부르고, 또는 작은 골짜기에 있다하여 소골이라고도 하였다. 가구 수는 민촌과 소골을 합하여 약 35호 정도인데, 여흥민씨 10여호, 경주최씨 5호, 진주강씨 3호 정도, 그리고 본관을 알 수 없는 김씨 3∼4호 정도가 거주하였다.

○ 이촌(넘말, 아랫말, 삼정하리) : 이촌은 구리고개와 근장골의 남쪽, 강촌의 동북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이곳에 약 350년 전부터 이씨가 많이 살았기 때문에 이촌(李村)이라 하고, 강촌(姜村)에서 고개 너머 마을이 있다고 하여 넘말, 삼정골 아래에 있어 아랫말 또는 삼정하리라고도 한다. 이촌은 25호 정도의 경주이씨 집성촌이다.

○ 덕골(덕동, 덕곡) : 덕골은 지부랭이의 동쪽 아래, 소골의 남쪽 고개 넘어 큰 골짜기에 위치한 마을이다. 덕골은 아래덕골·위덕골로 나뉘어 불리었는데 덕골에는 진주강씨, 원주변씨, 본관을 알 수 없는 유씨 등 10여호가 거주하였다.

현재 덕골은 대청댐 건설로 인해 수몰되었으며, 덕골에 거주하였던 주민들은 지금의 소골(민촌)로 이주하였다.

삼정동의 세거성씨
  • ○ 진주강씨(晋州姜氏) : 삼정동의 진주강씨는 고려 강민첨을 시조로 하고 있으며, 그 분의 묘가 예산 감천동에 있다. 그리고 진주강씨의 세거지는 온양인데, 온양에 세거하게된 동기는 강민첨의 8대 손이었던 평창군수 강일우의 처가 함양박씨로 묘가 온양 남면 서봉에 있었던데 연유한다. 온양에 세거하던 진주강씨 후손 가운데 회덕으로 이주한 사람은 강일우의 손자 강문한(1464년∼1547년)이다. 강문한이 온양에서 회덕현 자운동(잔골) 한사산(석봉동 한절구지) 일대로 이주하면서 진주강씨가 회덕에서 세거하게 된 것이다. 강문한이 온양에서 회덕으로 이주한 연유에 대해서는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다만 강문한이 회덕에 세거 성씨의 하나였던 생원 김숙준의 딸인 광산김씨와 혼인하면서 처향을 따라 이주한 경우로 추정된다.

강문한 5형제를 두었는데 강림의 후손들은 신탄진 석봉동 일대에 세거하였고, 강침의 후손들은 삼정리 일대에 많이 거주하였다. 강침의 자손 가운데 14세 강순의 아들인 강제노의 후손들은 부수동의 남쪽, 이현동의 북쪽에 있는 직동 피골에 주로 세거하였고, 강학노의 후손들은 삼정리와 미호리 일대에 세거하였다. 삼정리 강촌에 세거한 진주강씨는 대부분 강학노의 후손들이다.

진주강씨가 삼정리 강촌에 언제부터, 어떤 연유로 세거하게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삼정동 입향조 강학노의 생년이 1588년(선조 21)이고, 몰년이 1670년(현종 11)이었던 것으로 보아, 17세기경에 삼정리에 입향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 여흥민씨(驪興閔氏) : 여흥민씨가 회덕근교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민충원으로 부터이다. 민충원의 부친 민심언은 개성유수를 지냈는데, 그의 처 송씨부인(여산송씨)은 원래 이 지역 사람이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뒤에 그의 아들 민충원에 의해 송씨부인의 묘소가 이곳 탄동(유성구 도룡동)에 정해졌다. 그후 민충원은 모친의 묘소 아래에 와서 거주하였으므로 이 지역의 입향조가 되었고, 민충원 자신과 부인의 묘도 이곳에 정해지게 되었다. 여흥민씨의 입향 시기는 민충원의 아들 민수가 1456년(세조 2)에 생원시에 급제하였던 것으로 보아 15세기 전반기쯤으로 생각된다. 그후 민충원의 아들 민수와 손자 민구손을 비롯한 그의 후손들의 묘소가 지금의 대덕구 삼정동에 정해졌고, 이후 여흥민씨의 선영이 됨에 따라 후손들이 그 아래에 모여 살게 되어 민촌을 이루었다. 여흥민씨들 중 특히 민구손의 증손인 민여검과 그 직계 후손들은 16세기 이후 회덕에 세거하면서, 세칭 '민씨삼세칠효'를 배출하여 효자의 가문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역시 민구손의 증손인 민여검의 후손 중에서는 17세기 서인계 핵심을 이루는 민정중·민유중이 배출되었다. 17세기에 회덕향안의 개수시 여흥민씨의 대거 입록은 바로 이러한 족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여흥민씨의 대표적인 집성촌은 유성구의 도룡동과 궁동에 분포되어 있고, 대덕구의 지역에는 민여검·민구손·민수 등의 묘소가 있는 삼정동에 여흥민씨들의 집성촌이 형성되어 있다.

○ 경주이씨(慶州李氏) : 삼정동에 거주하는 경주이씨는 25세 이굉의 후손들이다. 경주이씨는 시조(始祖) 이알평(표암공)으로부터 17세 이천(국당공파 파조)의 3자 이달충(제정공파 파조)의 후손들이다. 그리고 삼정동의 경주이씨들은 제정공파의 후손들 가운데서도 시조로부터 24세 되는 연산군과 명종 대에 병절교위를 지냈던 이성호의 후손들이다. 이성호의 후손들이 삼정동에 입향하게 입향 연유와 입향시기 등은 정확히 확인 할 수 없다.

이성호는 이인과 이굉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인의 후손들은 미호동에 세거하였고, 이굉의 후손들은 삼정·용호·석봉동에 세거하였다. 그런데 이굉의 생년이1536년(중종 31)이고 몰년이 1597년(선조 30)이어서 최소한 16세기 후반 이후에 삼정동에 입향하였다고 할 수 있다. 입향조 이굉의 묘는 삼정동에 있다.

삼정동의 옛 지명
  • ● 개샴 [마을] : 장바구니고개에서 북쪽으로, 강촌 가는 길 동쪽 아래의 골짜기이다. 일설에는 주막집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개를 잡아서 개 잡는 샘이라 하여 개샴이라 하였다 한다. 현재는 대청댐 건설로 수몰되었다.

  • ● 감투바위 [바위] : 상여골에서 덕고개로 올라가는 길옆, 찬샴과 덕고개 사이의 날망 근처에 바위가 있는데, 바위 모양이 옛날에 대감들이 쓰던 감투와 같이 생겼다 하여 감투바위라 하였다.

  • ● 갓골 [골] : 장바구니배턱의 동쪽(대청호 동쪽)과 붓당골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가장자리에 있는 골짜기라는 뜻이다.

  • ● 강촌(삼정상리, 웃말, 윗말) [마을] : 장바구니고개의 북쪽, 이촌의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400여년 전부터 진주강씨들이 거주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이촌이나 민촌, 삼정마을에 비하여 높은 지대에 있다하여 윗말이라고도 하였다.

  • ● 건넝골 [골] : 수렁골의 동쪽, 절터골의 서쪽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장바구니고개 올라가는 길 남쪽에 있다.

  • ● 공무동골(공무덤골) [골] : 장바구니고개의 북쪽, 곡산연씨 사향탑의 서쪽, 붓당골의 동쪽 사이에 있다. 공씨들의 무덤이 있는 골짜기란 뜻이다.

  • ● 꽃봉산(꽃봉날망) [산] : 강촌하고 이촌 사이에 가장 높은 산봉우리로, 산봉우리의 모양이 꽃봉오리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 길막은고개(질막은고개) [고개] : 옥녀봉의 서쪽, 소징이들 남쪽, 소골의 동남쪽에 있는 고개이다. 길이 꼬부라져서 막힌 것 같은 고개라는 뜻이다. 일설에 고종(민비) 때 길은 막아야 딸이 잘된다는 풍수설로 길을 막았다하여 길막은고개라 한다.

  • ● 노루골 [골] : 백배미골의 남쪽, 큰골의 북쪽 사이에 있는 골짜기이다.

  • ● 덕고개(덜골고개, 덕동현, 덕곡현) [고개] : 삼정동 덕골에서 서쪽으로 상여골을 거쳐 용호동 하산디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덕골 마을 뒤쪽에 있는 고개라서 덕고개라고 하였다.

  • ● 덕골(덕동, 덕곡) [마을] : 소골의 남쪽 고개 넘어 큰 골짜기의 마을로, 지부랭이 동쪽 아래에 있던 마을이다. 대청댐으로 인해 수몰되었다.

  • ● 덕골방죽(덕골저수지, 덕곡저수지) [못] : 덕골의 동쪽 아래에 있는 방죽이다. 덕고개 골짜기인 덕골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가둔 곳이었으나, 현재는 대청댐으로 인해 수몰되었다.

  • ● 두루봉 [산] : 덕고개의 북쪽, 모래봉의 남쪽에 있는 산봉우리로서 삼정동과 용호동의 경계를 이룬다.

  • ● 대청약수터 [약수] : 백뱀이골의 남쪽에 있는 약수터이다.

  • ● 말무덤 [산] : 붓당골에서 오르는 가장 높은 산봉우리로, 강촌과 장바구니나루터 중간에 있다. 옛날 이 산봉우리에 말을 묻은 커다란 말무덤이 있었다 한다.

  • ● 모래봉 [산] : 두루봉 북쪽에 있는 산봉우리로, 삼정동과 용호동의 경계를 이룬다. 지금은 용호동 지역이다.

  • ● 민촌(삼정상리, 재실말) [마을] : 솟대거리의 남쪽, 소징이의 북쪽, 산소골 동쪽 아래에 있다. 200여년 전부터 민씨가 많이 사는 마을이라 민씨마을 즉 민촌이라 한다. 또한 삼정골 위쪽에 있어서 삼정상리라고도 부르며, 이곳에 재실이 있었다고 해서 재실말이라고도 한다.

  • ● 배가는골 [골] : 덕고개의 동북쪽, 상여골과 가능골의 서쪽 위쪽의 골짜기이다.

  • ● 방아골(방앗골) [골, 마을] : 소골 서쪽 바로 근처에 있는 골짜기와 마을이다.

  • ● 백배미골(백뱀이골) [골] : 삼마골의 남쪽, 노루골의 북쪽 사이의 골짜기로 대청약수터가 있으며, 논이 조그마하게 붙어 있어 백배미골이라 하였다.

  • ● 붓당골(불당골) [골] : 장바구니배턱 동쪽, 동무동골 바로 서쪽 아래에 있는 골짜기이다. 옛날에 이 골짜기에 불당이 있어 불당골이라 부른다.

  • ● 곡산연씨 사향탑 [탑] 장바구니고개 정상 바로 북쪽 길가에 있고, 강촌의 남쪽으로 있다. 옛날에 곡산연씨의 선대들이 살던 세거지를, 후손들이 기리기 위하여 세운 탑이다.

  • ● 산소골 [골] : 민촌의 서쪽, 방아골의 북쪽으로 여흥민씨들 묘가 있는 골짜기라 하여 산소골이라 한다.

  • ● 삼정골(산전골) [골, 마을] : 강촌의 동쪽 아래, 민촌 북쪽에 있는 골짜기에 마을이 있다. 이곳에 맨 처음 살던 사람들이 산전을 일구며 생활하였다 하여 산전골이라 불렀고, 또 풍수설에 세 정승이 태어날 지세라 하여 삼정골이라 하였다.

  • ● 삼정리배턱(삼정리선착장) [나루] : 민촌 북쪽에 있는 나루이다.

  • ● 성산 [산] : 덕골방죽의 남쪽, 연봉의 북쪽에 있는 산으로, 성씨네 종산 이라서 성산 이라 부른다.

  • ● 한산 [산] : 한씨네 종산 이라서 한산이라 하였다.

  • ● 세슨날(세선날, 쇠선랄) [산] : 산소골·방아골·소골의 서남쪽, 어터골에서 모래봉 산 능선으로, 칼이나 낫의 날처럼 날카롭게 생겼다고 해서 세슨날이다.

  • ● 소골(소곡, 우골, 우곡, 산촌) [골] : 삼정골의 남쪽, 지부랭이 북쪽, 소징이 서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에 있다. 이곳의 지세가 소가 누워 있는 것 같은 와우형이라하여 우골·우곡이라 하였으며,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산촌이라고도 하였다. 또한 조그만 골짜기라 하여 소골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곳이 바로 삼정승이 나올 명당이 있는 곳이라 한다.

  • ● 소징이 [들] : 강촌의 동쪽 아래에 있는 들인데, 대청댐으로 인해 수몰되었다.

  • ● 솟대거리 [들] : 강촌 동쪽 아래, 민촌 북쪽에 있는 들이다. 옛날 마을 입구에 솟대를 세웠기 때문에 솟대거리라 하고 그 근처에 있는 들도 솟대거리라 부른다.

  • ● 수렁골 [골] : 장바구니배턱에서 장바구니고개로 올라가는 어귀 남쪽, 건넝골의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물이 많아 수렁 같아서 수렁골이라 부른다.

  • ● 어터골(어허동) [골] : 소골의 남쪽, 지부랭이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어씨네가 살던 곳이라 하여 어터골이라 부른다.

  • ● 오장굴(오장골) [골] : 구리고개의 동쪽 아래, 구리고개 마을의 남쪽, 이촌의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 옥녀봉 [산] : 덕골의 북쪽, 질막은고개와 소골의 동쪽에 있는 산이다. 호수가 빙 둘러 있어서 섬과 같은 산봉우리다.

  • ● 이촌(넘말, 아랫말, 삼정하리) [마을] : 구리고개와 오장굴의 남쪽, 강촌의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부터 이씨가 많이 살았기 때문에 이촌이라 한다. 또한 강촌에서 고개 너머에 마을이 있다하여 넘말이고, 삼정골 아래쪽에 있어 아랫말·삼정하리라고도 부른다.

  • ● 장바구니고개 [고개] : 장바구니배턱에서 동쪽으로 절터골 위쪽, 사향 탑 남쪽에 있는 고개로 삼정골의 정수리가 된다. 삼정에서 용호로 넘어가는 고개로 장보러 다니는 고개라는 뜻이다. 또한 장바구니배턱으로 넘어가는 고래라는 뜻이기도 하다.

  • ● 장바구니배턱(장바구니배터) [나루터] : 삼정에서 용호로 넘어오는 장바구니고개와 검문소의 서쪽에 있던 나루터로 삼정동과 청원군 현도면 노산리를 왕래하던 나루터이다. 또한 장보러 다니는 사람이 이용하는 배 터라는 뜻이다.

  • ● 장수바위(장수바우) [바위] : 큰골 위쪽에 있는 바위로, 모양이 장수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 절터골 [골] : 장바구니고개 남쪽, 건넝골의 동쪽 바로 위의 골짜기이다. 옛날에 이곳에 절이 있어서 절터골이라 했다.

  • ● 젖밭(젖밭거리) [들] : 이촌의 동남쪽, 강촌의 동쪽, 민촌의 동북쪽, 가들의 서쪽에 위치한 들이다. 일설에 임진왜란 당시 이 마을에 사는 한 아낙네가 들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왜놈들이 나타나 아낙네의 젖을 만지며 추행을 하자, 그 아낙네는 칼로 자신의 젖을 자르고 숨졌다 한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들에 열녀비를 세웠는데, 지금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 없다. 때문에 이곳을 젖밭·젖밭거리라 부른다. 현재는 대청댐으로 인해 수몰되었다.

  • ● 지부랭이 [골] : 덕골방죽의 서쪽, 어터골의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 큰골 [골] : 백배미골의 남쪽과 장바구니배턱의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 황새진날(황새깃날) [산] : 옥녀봉의 북동쪽으로 흘러내린 날망이다. 이곳은 산세가 황새 깃을 닮았다고 하여 황새진날·황새깃날이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