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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족부락이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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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19-04-25 11:04 조회34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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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_arrow.gif동족부락이란?

동족 부락이란 동일 조상에서 나온 동본 동성이 한 부락 또는 한 지방에서 집단 거주하는 것을 말한다. 1930년대의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마을의 반수 이상이 동성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마을을 구성하는 마을 사람 전원이 한 성씨를 갖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로 한 성씨가 비록 주민의 전부는 아니라 하더라도, 마을을 주도할 때 그 마을을 동족 부락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동족 부락의 개념을 부락 내 동성 집단의 구조와 기능이 비 동성 각성(非 同姓各姓) 거주 집단까지를 포함하는 부락 전체의 그것과 일치하거나 또는 지배적 영향력을 갖는 부락이라 하기도 한다.

본 조사에서 동족 부락이라 함은, 하나의 자연 촌락에서 하나의 성씨 혹은 두세 개의 성씨가 동본으로 세거 하면서, 존재할 때 동족 부락이라 설정하여 파악하였다. 조사의 범위는 대덕구로 한정하였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옛 회덕현의 행정구역에 포함되어 있었던 동구 직동·가양동·흥룡 등과 유성구 전민동 일대가 제외되었다

 

대덕의 동족부락

대덕구 지역에서 파악된 동족 부락은 약 40개 마을이었다. 물론 이러한 마을들 가운데에는 한마을에 23개의 성이 복합되어 있는 경우도 각각 별개의 동족 부락으로 파악되었다. 그런 예로 와동 평촌의 충주 박 씨·순창 설 씨, 장동 산디의 경주 최 씨·옥천 전 씨·창녕 조 씨, 갈전동에 원주 변씨·제주고씨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자연 촌락을 하나의 마을로 보면 37개 촌락에 해당된다.

그런데 대덕구의 자연 촌락은 대덕구가 1960년대 이후 점차 도시화·산업화하는 과정에서 개발되어 현재 동족 부락으로 존재하는 마을은 극히 적다. 조사된 동족 부락 가운데 현재까지도 동족 부락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곳은 다음과 같다.

 

연축동 위 골의 경주 김 씨, 와동 평촌의 충주 박 씨·순창 설 씨, 와동 남월의 광산 김 씨, 비래동 비래 본동의 고성이 씨, 석봉동 한 절구지의 진주 강 씨, 평촌동의 전주 이 씨, 장동 산디의 경주 최 씨·창령 조 씨·옥천 조 씨, 장동 텃골의 밀양 박씨, 장동 진골의 은진 송 씨, 장동 욕골의 경주 최 씨, 용호동 하용호의 진주 강 씨, 이현동 심곡의 경주 김 씨, 이현동 이현의 동래 정 씨, 갈전동 갈전의 원주 변씨, 삼정동 강촌의 진주 강 씨, 삼정동 민촌의 여흥 민 씨, 삼정동 이촌의 경주 이 씨, 미호동 벌말의 은진 송 씨, 미호동 신촌의 연안 차 씨 모두 19개의 자연 촌락이다. 이러한 촌락은 현재 대부분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이거나 대청댐 주변의 상수도 보호구역이어서 온전할 수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19개 마을을 제외한 23개의 마을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이들 자연 촌락이 사라지게 된 것은, 첫째로는 대청댐 건설로 황호·부수동처럼 사람이 거주하였던 마을 전체가 수몰된 경우이며, 둘째로는 신탄진동·덕암동에서처럼 지역이 도시화되면서 상업지역과 주택지로 개발된 것이고, 셋째로는 대화동의 1·2 공단과 목상동·문평동·신일동의 3·4 공단처럼 산업단지로 개발된 경우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상서동·평촌동처럼 국가 기업이 입주하고 주변에 공장들이 자연스럽게 들어와 공업지대가 되었다. 이러한 개발로 자연 촌락들이 흔적을 찾을 수조차 없게 되었고, 아울러 촌락의 인문 사회적 환경도 파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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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족부락의 형성시기

각각의 동족 부락들이 언제 형성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대덕구에 현재 남아있는 동족 부락 가운데 정확하게 부락이 형성된 시기를 알 수 있는 경우는 극소하다. 다만 후손들의 증언으로 입향조의 생몰연대를 족보상에 찾아서 확인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와 같은 작업을 통해서 입향 시기를 대략 확인할 수 있는 경우는 모두 27건이었다



  • 이들 입향시기를 대략 세기별로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다.

  •  
 

14세기

15세기

16세기

17세기

18세기

1

4

10

11

1

27

이와 같은 표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약간의 문제점이 있지만 자연 촌락 형성의 대세를 파악하는 데에는 큰 문제점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위 표에서처럼 회덕현의 동족 부락의 형성은 15세기에서 시작하여 16·17세기에 주로 형성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15세기 이전에는 회덕에 동족 부락 내지는 자연 촌락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실제로 송촌동의 경우에 은진 송 씨들이 입 향하기 전에 본관을 알 수 없는 김 씨가 살았었기에 김 가쟁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으며, 또한 장동 산디마을의 경우 가장 먼저 입 향한 성씨가 창녕 조씨인데 이보다 먼저 정 씨들이 거주하였다 한다. 그러나 현재 회덕 지역에서 세거 하였던 성씨들 중, 15세기 이전에 세거 하였던 주민에 대해서는 파악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15세기 이전에 회덕 지역에 살았던 성관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전해오는 자료도 없고, 이들 가문이 후대에까지 회덕 지역에 거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회덕 지역의 동족 부락이 16·17세기에 와서 주로 형성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시대 전형적인 동성마을은 대체로 17세기 이후에 형성되어, 18·19세기를 거치면서 보편적인 마을의 형태로 발달하였다고 보는 기존의 연구와는 다른 결과이다. 즉 그간의 연구들은 동성마을의 형성은 조선 후기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연구는 각각의 마을들에 대한 사례 연구를 통해 얻은 연구결과이므로 이를 전체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좀 무리가 있지 않나 싶다. 아마 지역에 따라 다르겠지만 한 지역에 형성된 모든 동성마을을 조사하여 파악한다면 보다 효과적이라고 생각된다. 그 점에서 금번 회덕에서 얻은 조사 결과는 의미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동족 부락 형성의 배경이 되는 입 향사유를 조사하였다. 그런데 입향사유을 확인할 수 있는 경우가 몇 사례되지 않았다. 모두 15개 마을만이 입 향사유를 알 수 있었는데, 이 가운데 처향으로 입 향한 것이 13건이었고, 외향이 1, 지방관으로 왔다가 정착한 사례가 1건이다. 이처럼 처향을 따라 입 향한 사례가 많은 것은 당시의 상속 관행에 따른 보편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조선 전기부터 대략 17세기까지의 상속제는 자녀 간 균분상속이었다. 따라서 딸도 친정으로부터 아들과 똑같이 재산을 물려받았고, 친정의 제사도 지냈다. 이러한 상속 관행이 처향으로 입 향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그리고 지방관으로 그 지방에 부임하였다가 그 지역에 정착하는 경우도 조선시대에는 흔히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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