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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족부락이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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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19-04-25 11:12 조회16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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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덕의 동족마을 소재지

  • 우리나라의 마을은 그 마을의 민가가 밀집한 마을을 집촌(集村)이라 하고, 민가가 흩어져 있는 경우를 산촌(散村)이라 한다. 동족부락의 경우에 집촌이 많으며 산촌이 적은 편이라 한다. 실제로 동족부락이 위치한 곳의 지세를 조사한 선생영조(善生永助)에 의하면 1,685개 마을에서 산기슭에 위한 것이 602개, 평야에 위치한 마을이 356개, 배산임수에 위한 것이 277개, 강가에 위치한 연하부락이 98개, 계곡에 위치한 마을이 97개, 바다에 임한 임해부락이 62개, 구릉에 위한 것이 54개, 산음에 위치한 것이 51개, 분지에 위치한 것이 44개, 그리고 연도에 위치한 것이 44개 였다고 한다.


  • 그런데 회덕의 조사에서 동족부락으로 파악된 마을을 구분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물론 이와 같은 분류는 분류자에 따라서 분류상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산기슭

평 야

구 릉

계 곡

연 하

14(36%)

8(21%)

7(18%)

2(5%)

8(21%)

  • 위의 분류가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갖는다면 회덕의 경우 산기슭에 위치한 부락 36%로 가장 많고, 평야·계곡·연하에 위치한 동족마을의 숫자는 비슷한 비율이다. 이러한 것은 회덕이 위치한 지형적인 여건과 관계가 깊다고 생각된다. 즉 회덕 동북쪽 응봉산과 계족산에 연한 마을들은 대부분 산기슭에 위치하였다. 예컨데 계족산 동쪽의 삼정동에 위치한 강촌·이촌·민촌, 연축동의 웃골, 갈전동 갈밭, 이현동의 심곡·이현 등의 마을들이 그러하다. 그리고 대화동의 구만이, 용호동의 하용호, 부수동의 부수골과 형지원, 황호동의 느릇구지, 미호동의 벌말·신촌·숫굴 등은 연하부락으로 분류할 수 있다. 오정동의 새뜸, 읍내동의 당아래, 와동의 평촌과 남월, 문평동 들말, 용호동 하산디 등은 평야로 분류될 수 있다. 기타 석봉·덕암·상서동·평촌동에 위치한 마을은 구릉성 마을이라 할 수 있다. 회덕의 경우 마을이 지형상 어느 곳에 위치하였는가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 마을이 위치한 지형에 따른 영향이 가장 큰 것이라 할 수 있다.


  • 그런데 산기슭에 위치한 마을일수록 집촌(集村)이 대부분이었다. 그 예로 장동의 산디·텃골·욕골, 대화동의 망골, 이현동 심곡·이현, 갈전동의 갈전, 삼정동의 강촌·민촌·이촌 등이다. 그리고 평지와 구릉지대에 위치한 마을일수록 산촌이 많았다. 예컨데 평촌·상서·덕암동 일대의 경우에는 마을들이 있는 곳을 합하여 열두 방두마루라 하였다 한다. 열두 방두마루는 이 지역에 있는 자연촌락이 12개정도 이었기 때문이라 한다. 이는 이곳의 자연촌락이 분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목상·문평·신일동의 경우도 그곳의 마을들을 합하여 을미기라 하였다 한다. 을미기는 등에 붉은 점이 있는 뱀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곳의 마을들이 뱀의 등에 붉은 점이 있는 것처럼 띄엄띄엄 산촌되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산촌이라 하여도 이들 자연촌락 사이에는 집촌의 경우와 같은 하나의 생활권과 사회권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 자연촌락 사이에는 함께 두레를 조직하거나 연반계 등, 마을 공동체의 생활을 함께 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 마을조사시 주민들이 자연촌락을 하나 하나 별개로 파악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증언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비록 산촌으로 분산되어 생활하였지만 한 마을과 똑같이 생활하였다는 것이다.


  • 따라서 산촌이냐 집촌이냐 하는 것도 마을이 위치한 지형 상에 따라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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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족마을의 구조

  • 한 동족부락의 구조를 언급하게 될 때 그 마을에 양반 또는 상민이나 천민만으로 이루어진 마을의 존재는 매우 드물다. 대체로 마을의 신분구성에 있어서 어느 신분 층의 숫자가 주도적으로 많았는가 또는 특정 신분의 인구수와 관계없이 그 마을에서 어느 신분 층이 주도적이었는가에 따라서 반촌·일반 촌으로 나뉠 수 있을 것이다.


  • 회덕에서 파악된 동족부락의 경우는 대부분 반촌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회덕의 동족부락이 대부분 반촌으로 이루어진 것은 회덕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양반이 특히 더 많았기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느 마을이던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양반은 있기 마련이고, 양반들은 항상 마을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어느 자연촌락에 양반만 거주한다든지, 아니면 양민이나 천민만이 거주하는 마을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동족부락으로 파악되는 대부분의 마을들은 양반이 그 마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거나, 비록 호구 수는 적어도 양반이 주도하였던 마을은 반촌으로 파악될 수밖에 없다.


  • 회덕에서 파악된 자연촌락의 경우에도 이런 방식으로 파악하였기 때문에 대부분 반촌으로 파악된 경우이다. 뿐만 아니라 양반들이 주도권 잡고 있던 자연촌락들은 양반들이 소유한 토지가 많았고, 따라서 토지에 경제적 기반을 둔 조선사회에서 양반들의 사회적 이동이 다른 신분 층에 비하여 적기 때문에 오래도록 후대까지 자연촌락이나 집성촌으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 그리고 같은 반촌의 경우에도 그 마을에 거주하는 양반들의 사회적 위상에 따라 어느 정도는 서열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회덕현의 경우에 있어서 현 내의 주도적 성씨가 어느 성씨냐에 따라 붙여진 '남송북강(南宋北姜)'이라는 말이 그러하다. 이와 관련하여 {회덕향안}의 서문에는

내가 생각하건대 호서(湖西)에는 옛부터 삼대족의 이름이 있었으니, 연산의 김(金)과 이산의 윤(尹)이고 그 하나는 즉 회덕의 우리 송씨였다. 그러므로 향안에 수록된 송씨가 많고, 일향 중에 또 남송북강(南宋北姜)이라는 칭(稱)이 있으니 강씨가 다음으로 많다. 무릇 김·윤·송 삼족은 서로 혼하여 친목케 된 의가 더욱 다른 바가 있으니 그 가장 현저한 성씨들은 경주김·연안이·동래정·반남박·순천박씨이며, 황·한·연·변·노·양씨 등이 별처럼 이어져 그 거주지와 선영이 이어져 있고, 경조사에 빠지지 아니하니, 이미 족히 은근히 접촉하고 기쁨과 사랑을 맺고 있다.
라 하여 한지역내의 신분상의 위상의 차이를 보여 준다. 즉 회덕지역은 은진송씨와 진주강씨들이 많고, 그 다음으로 경주김씨, 연안이씨, 동래정씨, 반남박씨, 순천박씨 순 이었으며, 그 다음으로는 회덕황씨, 청주한씨, 곡산연씨, 원주변씨, 신창노씨, 남원양씨 등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성씨는 회덕 내에서 대부분 동족부락을 이루고 있었으므로 동족부락 사이에도 그 마을에 근거를 둔, 양반의 사회적 위상에 따라 어느 정도는 서열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와 같이 회덕을 대표하는 양반가문이 세거하였던 자연촌락은 촌락의 위치가 산기슭과 구릉 지대에 존재하였고, 평야지대에 촌락을 형성한 경우는 몇 사례되지 않았다. 예컨대 은진송씨의 송촌, 진주강씨의 석봉동, 경주김씨의 중리, 동래정씨의 이현, 청주한씨의 중리동 한촌, 곡산연씨의 황호(부수), 원주변씨의 갈전 등이 그러한 예로 들 수 있다. 그리고 산기슭과 구릉지대에 형성된 촌락들이 다른 위치에 형성 된 마을에 비하여 비교적 이른 시기에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회덕의 경우에 산기슭과 구릉지에 위치하는 촌락이 형성된 시기도 오래되었고, 회덕을 대표하는 양반들이 세거하였다. 그 까닭은 아마도 산기슭에 위치한 마을들은 마을 앞으로 강이 흐르는 경우, 배산임수의 마을이 되는 것으로 풍수 상 명당이기 때문에 이 곳의 지역을 먼저 차지하였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실제로 회덕의 경우에 촌락이 풍수적으로 명당이라고 전하는 곳이 많다. 예컨대 부수동 부수골의 경우에 연화부수 형국의 명당이 있었고, 그리고 용호동이 용의 형국이었다고 하는 것이 그러한 예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여지도서}의 회덕조에 의하면 회덕의 경작지는 한전이 수전의 2배나 되었던, 당시의 실정에서 경작지가 있는 구릉과 산기슭에 양반들이 먼저 반촌을 마련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회덕은 대동법에서도 산군(山郡)에 해당하여 해군(海郡)에서 미로 납공하였던 것과는 달리 목면으로 납공하였다.

따라서 요약하면 회덕의 촌락은 대부분 반촌이었고, 반촌들도 그곳에 거주하는 양반들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어느 정도 서열적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또한 반촌들은 회덕의 자연촌락 가운데 비교적 이른 시기에 형성되었고, 촌락의 위치는 구릉지대나 산기슭에 주로 위치하였다. 이는 회덕의 한전이 수전의 2배나 되어 산기슭이나 구릉이 경제적으로 유리하였으며 또한 이곳이 풍수적으로 명당에 해당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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