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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족부락이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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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19-04-25 11:12 조회42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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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덕의 동족마을 소재지

우리나라의 마을은 그 마을의 민가가 밀집한 마을을 집촌(集村)이라 하고, 민가가 흩어져 있는 경우를 산촌(散村)이라 한다. 동족 부락의 경우에 집촌이 많으며 산촌이 적은 편이라 한다. 실제로 동족 부락이 위치한 곳의 지세를 조사한 일본인 학자 선생영조(善生永助)에 의하면 1,685개 마을에서 산기슭에 위치한 것이 602, 평야에 위치한 마을이 356, 것이 277, 강가에 위치한 연하 부락이 98, 계곡에 위치한 마을이 97, 바다에 임한 임해부락이 62, 것이 54, 위치한 것이 51, 분지에 위치한 것이 44, 그리고 연도에 위치한 것이 44개였다고 한다.

조사에서 동족 부락으로 파악된 마을을 구분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물론 이와 같은 분류는 따라서 분류상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산기슭

평 야

구 릉

계 곡

연 하

14(36%)

8(21%)

7(18%)

2(5%)

8(21%)

위의 분류가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갖는다면 회덕의 경우 산기슭에 위치한 부락이 36%로 가장 많고, 평야·계곡·연하에 위치한 동족마을의 숫자는 비슷한 비율이다. 이러한 것은 회덕이 위치한 지형적인 여건과 관계가 깊다고 생각된다. 즉 회덕 동북쪽 응봉산과 계족산에 연한 마을들은 대부분 산기슭에 위치하였다. 예컨대 계족산 동쪽의 삼정동에 위치한 강촌·이촌·민촌, 연축동의 웃골, 갈전동 갈밭, 이현동의 심곡·이현 등의 마을들이 그러하다. 그리고 대화동의 구만이, 용호동의 하용호, 부수동의 부수골과 형지원, 황호동의 느릇구지, 미호동의 벌말·신촌·숫굴 등은 연하부락으로 분류할 수 있다. 오정동의 새뜸, 읍내동의 당아래, 와동의 평촌과 남월, 문평동 들말, 용호동 하산디 등은 평야로 분류될 수 있다. 기타 석봉·덕암·상서동·평촌동에 위치한 마을은 구릉성 마을이라 할 수 있다. 회덕의 경우 마을이 지형 상 어느 곳에 위치하였는가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 마을이 위치한 지형에 따른 영향이 가장 큰 것이라 할 수 있다.

산기슭에 위치한 마을일수록 집촌(集村)이 대부분이었다. 그 예로 장동의 산디·텃골·욕골, 대화동의 망골, 이현동 심곡·이현, 갈전동의 갈전, 삼정동의 강촌·민촌·이촌 등이다. 그리고 평지와 구릉지대에 위치한 마을일수록 산촌이 많았다. 예컨대 평촌·상서·덕암동 일대의 경우에는 마을들이 있는 곳을 합하여 열두 방두마루라 한다. 열두 방두마루는 이 지역에 있는 자연 촌락이 12개 정도이었기 때문이라 한다. 이는 이곳의 자연 촌락이 분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목상·문평·신일동의 경우도 그곳의 마을들을 합하여 을미기라 한다. 을미기는 등에 붉은 점이 있는 뱀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곳의 마을들이 뱀의 등에 붉은 점이 있는 것처럼 띄엄띄엄 산촌이 되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산촌이라 하여도 이들 자연 촌락 사이에는 집촌의 경우와 같은 하나의 생활권과 사회권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 자연 촌락 사이에는 함께 두레를 조직하거나 연반계 등, 마을 공동체의 생활을 함께 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 마을조사 시 주민들이 자연 촌락을 하나하나 별개로 파악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증언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비록 산촌으로 분산되어 생활하였지만 한마을과 똑같이 생활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산촌이냐 집촌이냐 하는 것도 마을이 위치한 지형 상에 따라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 동족마을의 구조

 

한 동족 부락의 구조를 언급할 때 그 마을에 양반 또는 상민이나 천민만으로 이루어진 마을의 존재는 매우 드물다. 대체로 마을의 신분 구성에 있어서 어느 신분 층의 숫자가 주도적으로 많았는가 또는 특정 신분의 인구수와 관계없이 그 마을에서 어느 신분 층이 주도적이었는가에 따라서 반촌·일반 촌으로 나뉠 수 있을 것이다.

회덕에서 파악된 동족 부락의 경우는 대부분 반촌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회덕의 동족 부락이 대부분 반촌으로 이루어진 것은 회덕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양반이 특히 더 많았기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느 마을이던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양반은 있기 마련이고, 양반들은 항상 마을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어느 자연 촌락에 양반만 거주한다든지, 아니면 양민이나 천민만이 거주하는 마을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동족 부락으로 파악되는 대부분의 마을들은 양반이 그 마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거나, 비록 호구 수는 적어도 양반이 주도하였던 마을은 반촌으로 파악될 수밖에 없다.

회덕에서 파악된 자연 촌락의 경우에도 이런 방식으로 파악하였기 때문에 대부분 반촌으로 파악된 경우이다. 그뿐만 아니라 양반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던 자연 촌락들은 양반들이 소유한 토지가 많았고, 따라서 토지에 경제적 기반을 둔 조선사회에서 양반들의 사회적 이동이 다른 신분 층에 비하여 적기 때문에 오래도록 후대까지 자연 촌락이나 집성촌으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같은 반촌의 경우에도 그 마을에 거주하는 양반들의 사회적 위상에 따라 어느 정도는 서열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회덕현의 경우 현 내의 주도적 성씨가 어느 성씨냐에 따라 붙여진 '남송북강(南宋北姜)'이라는 말이 그러하다. 이와 관련하여 {회덕향안}의 서문에는

내가 생각하건대 호서(湖西)에는 예부터 삼대족의 이름이 있었으니, 연산의 김(金)과 이산의 윤(尹)이고 그 하나는 즉 회덕의 우리 송씨였다. 그러므로 향안에 수록된 송씨가 많고, 일향 중에 또 남송북강(南宋北姜)이라는 칭(稱)이 있으니 강씨가 다음으로 많다. 무릇 김·윤·송 삼족은 서로 혼인하여 친목케 된 의가 더욱 다른 바가 있으니 그 가장 현저한 성씨들은 경주김·연안이·동래정·반남박·순천박씨이며, 황·한·연·변·노·양씨 등이 별처럼 이어져 그 거주지와 선영이 이어 있고, 경조사에 빠지지 아니하니, 은근히 접촉하고 기쁨과 사랑을 맺고 있어, 한지역내의 신분상 위상의 차이를 보여 준다. 즉 회덕 지역은 은진송씨와 진주강씨들이 많고, 그 다음으로 경주김씨, 연안이씨, 동래정씨, 반남박씨, 순천박씨 순이었으며, 그 다음으로는 회덕황씨, 청주한씨, 곡산연씨, 원주변씨, 신창노씨, 남원양씨 등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성씨는 회덕 내에서 대부분 동족 부락을 이루고 있었으므로 동족 부락 사이에도 그 마을에 근거를 둔, 양반의 사회적 위상에 따라 어느 정도는 서열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와 같이 회덕을 대표하는 양반 가문이 세거하였던 자연 촌락은 촌락의 위치가 산기슭과 구릉 지대에 존재하였고, 평야지대에 촌락을 형성한 경우는 몇 사례되지 않았다. 예컨대 은진송씨의 송촌, 진주강씨의 석봉동, 경주김씨의 중리, 동래정씨의 이현, 청주한씨의 중리동 한촌, 곡산연씨의 황호(부수), 원주변씨의 갈전 등이 그러한 예로 들 수 있다. 그리고 산기슭과 구릉지대에 형성된 촌락들이 다른 위치에 형성된 마을에 비하여 비교적 이른 시기에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회덕의 경우에 산기슭과 구릉지에 위치하는 촌락이 형성된 시기도 오래되었고, 회덕을 대표하는 양반들이 세거하였다. 그 까닭은 아마도 산기슭에 위치한 마을들은 마을 앞으로 강이 흐르는 경우, 배산임수의 마을이 되는 것으로 풍수 상 명당이기 때문에 이곳의 지역을 먼저 차지하였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실제로 회덕의 경우에 촌락이 풍수적으로 명당이라고 전하는 곳이 많다. 예컨대 부수동 부수골의 경우에 연화부수 형국의 명당이 있었고, 그리고 용호동이 용의 형국이었다고 하는 것이 그러한 예라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여지도서}의 회덕 조에 의하면 회덕의 경작지는 한전이 수전의 2배나 되었던, 당시의 실정에서 경작지가 있는 구릉과 산기슭에 양반들이 먼저 반촌을 마련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회덕은 대동법에서도 산군(山郡)에 해당하여 해군(海郡)에서 미로 납공하였던 것과는 달리 목면으로 납공하였다.

따라서 요약하면 회덕의 촌락은 대부분 반촌이었고, 반촌들도 그곳에 거주하는 양반들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어느 정도 서열 적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또한 반촌들은 회덕의 자연 촌락 가운데 비교적 이른 시기에 형성되었고, 촌락의 위치는 구릉지대나 산기슭에 주로 위치하였다. 이는 회덕의 한전이 수전의 2배나 되어 산기슭이나 구릉이 경제적으로 유리하였으며 또한 이곳이 풍수적으로 명당에 해당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 세거성씨

 

대덕구에 세거하였던 성씨에 대하여서 알아보는 방법은 문헌에 의한 방법에 크게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현지조사에서는 주로 양반들이 세거하였던 동족마을에 대하여서만 조사가 가능하고, 동족마을 내에서도 양반들의 세거 실태만이 파악될 뿐 평민들의 세거 실태는 잘 파악되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는 평민들은 토지 소유가 많지 않고 소작하는 경우가 많아서 지역에 정착력이 취약하였고, 이러한 까닭으로 사회변화에 민감하여 입향과 출향이 빈번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덕에 세거하였던 세거성씨는 양반들을 중심으로 파악하는 방법밖에 없다.

문헌을 통해서 회덕 지방에 세거하였던 사족들의 성관(姓貫)을 파악하여 보기로 하겠다. 가장 먼저 회덕의 토성에 대하여 언급한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이다.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에는

회덕의 토성(土姓)이 4이었는데 황(黃)·임(任)·이(李)·방(房)이요, 망성(亡姓)이 1이니, 곽(郭)이요, 정민역(貞民驛)의 속성(續姓)이 2이니, 배(裵)·김(金)이다. 라 하여 조선전기 회덕현의 세거성씨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다. 즉 회덕의 토성(土姓)은 황(黃)·임(任)·이(李)·방(房) 등 4개의 성씨였다. 여기서 토성이라 함은 고려 초 성씨의 분정 시 그곳에 토착하면서 지배적 위치에 있었던 유력한 씨족, 또는 그곳을 본관으로 하면서 읍사(邑司)를 구성하였던 성씨집단을 지칭한다. 따라서 고려 말 조선 초 회덕지방의 유력한 토착 성씨는 황(黃)·임(任)·이(李)·방(房)씨 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회덕의 망성(亡姓)은 곽(郭)씨이었다. 여기서 망성이라 함은 종래의 토성이 소멸되거나 타지로 이주하여 {세종실록지리지} 작성을 위하여 성씨들을 파악할 당시에는 그곳에 없는 토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곽씨는 조선 초에는 회덕에 세거하였던 성씨이었으나 그 후 언제가 소멸되어 {세종실록지리지} 작성 시에는 회덕에 소멸된 성씨가 되었다. 그리고 정민역의 속성은 배(裵)씨와 김(金)씨이었다. 그런데 속성이라 함은 종래에 없는 성씨가 관(關)에 추가로 등재된 성씨를 가리킨다. 따라서 {세종실록지리지} 편찬 시 회덕에는 배씨와 김씨가 새롭게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세종실록지리지}가 간행될 당시 회덕의 세거성씨는 황(黃)·임(任)·이(李)·방(房)·배(裵)·김(金) 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회덕의 세거성씨는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李)·임(任)·황(黃)·방(房)·곽(郭), 배(裵)·김(金) 이라 하여 변화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16세기 초반 회덕의 세거성씨는 이(李)·임(任)·황(黃)·방(房)·곽(郭)씨 와 배(裵)·김(金) 등이었다. 이는 {세종실록지리지} 편찬 당시에는 망성이었던 곽씨가 다시 세거성씨로 파악된 점만이 다르다. 그리고 1760년대 간행된 {여지도서}에도 큰 변화는 없다. 이런 점에서 보면 회덕 지방은 조선 전기에는 세거하였던 사족 층에 큰 변화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회덕의 세거성씨에 대하여 잘 보여주는 것은 영조 대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회덕읍지}이다.

 {회덕읍지}의 성씨 조에는 본현(本縣) : 이씨(李氏)·임씨(任氏)·황씨(黃氏)·방씨(房氏)·곽씨(郭氏)· 배씨(裵氏)·김씨(金氏)(모두 驛이 있다.)

신증(新增) : 우거(寓居)한 성씨(姓氏)로는 송씨(宋氏)·김씨(金氏)·이씨(李氏)· 조씨(趙氏)·정씨(鄭氏)·강씨(姜氏)·연씨(延氏)·박씨(朴氏)·노씨(盧氏)·백씨(白氏)·변씨(邊氏)·최씨(崔氏)·전씨(全氏)· 권씨(權氏)·홍씨(洪氏)·임씨(林氏)·방씨(房氏)·장씨(張氏)라 하여 본 현에 5개 성씨와 역성(驛姓)이 2개 성씨 등 모두 7개 성씨가 있고, 신증으로 18개 성씨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회덕의 경우 조선 후기에 이르면 대거 새로운 사족들이 입향하여 회덕에 세거하기 시작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신증으로 {회덕읍지}에 새롭게 파악된 18개의 성씨들의 본관을 구체적으로 파악하여 보면, 본 현에 나타난 이씨는 경주이씨, 임씨는 풍천임씨, 황씨는 회덕황씨, 방씨는 본관미상, 곽씨는 현풍곽씨, 배씨는 본관미상, 김씨는 경주김씨이고 신증에 기록된 송씨는 은진송씨, 김씨는 경주김씨, 이씨는 연안이씨, 조씨는 임천조씨, 정씨는 동래정씨, 강씨는 진주강씨, 연씨는 곡산연씨, 박씨는 반남(혹은 순천이나 충주)박씨, 노씨는 신창노씨, 백씨는 수원백씨, 변씨는 원주변씨, 최씨는 전주(혹은 경주)최씨, 전씨는 옥천전씨, 권씨는 안동권씨, 홍씨는 남양홍씨, 임씨는 보안임씨, 방(房)씨는 본관미상, 장씨 (인동)장씨 등이었다.

{회덕읍지}에 신증으로 새로 기록된 18개의 세거성씨들의 입향 시기를 대략적으로 살펴보면 은진송씨 15세기, 경주김씨 16세기, 연안이씨 16세기, 임천조씨 미상, 동래정씨 16세기, 진주강씨 15세기, 곡산연씨 15세기, 반남박씨 16세기, 원주변씨 15세기, 옥천전씨 17세, 안동권씨 16세기 등에 해당된다. 따라서 이들 신증으로 기록된 성씨들이 조선 중·후기에 회덕에 입향하여 {회덕읍지}에 신증으로 등재된 것이 아닌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동국여지승람}과 {여지도서}의 성씨 조에서는 이들 성씨들이 왜 등재되어 있지 않았는가 이며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 어째든 조선후기 {회덕읍지}가 간행될 당시 회덕의 대표적인 세거 성씨는 본 현 5개성, 속성2, 신증 18개성 등 모두 합하여 25개의 성씨가 세거한 것을 알 수 있다.

세거성씨와 관련하여 조선 후기 회덕에 세거하였던 사족들의 실태를 가장 보여주는 것은 「회덕향안」이라 할 수 있다. 회덕「향안」과 「청금록」에 등재된 각성과 그 입록자의 숫자는 '회덕의 세거성씨 일람표'를 통해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