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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덕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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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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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19-04-25 13:26 조회1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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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_arrow.gif향교의 역사
  113-1.jpg향교(鄕校)란 전통시대 지방의 관립학교(官立學校)에 대한 명칭이다.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지방학교의 연원은 멀리 고구려 시대의 '경당'에까지 소급될 수 있으나, '향교'라는 이름으로의 역사는 고려시대에서 비롯되었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일반화되었다.
  조선사회는 유교이념을 치국의 원리로 삼는 유교중심의 국가였다. 따라서 조선왕조는 국초부터 이러한 유교이념을 가르치는 기초적 교육기관으로서 향교의 설립과 운영을 매우 중시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초기부터 일읍일교(一邑一校)의 원칙 하에 전국의 330여개의 군·현(郡·縣)에 향교를 설치하였고, '향교의 진흥'을 수령의 주요 평가항목으로 설정하는 등 그 진흥을 위하여 적극적인 노력을 경주하였다.

조선시대에 있어서 지금의 대전 대덕구는 동구 일원 및 유성구의 일부 지역과 함께 회덕현으로 편재되어 있었고, 지금의 대덕구 읍내동은 당시 회덕의 행정적 중심지였다. 따라서 읍내동에는 수령의 행정청인 회덕관아는 물론, 향교와 객사, 사창, 향사당 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현존하는 회덕향교는 읍내동 옛 관아 터로부터 북쪽 방향으로 1리 남짓한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회덕향교는 1410년(태종10)에 처음 건립되었다고 하나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 대부분의 향교가 조선 초기에 건립되어, 회덕향교의 건립도 조선 초기에 이룩되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회덕향교는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버려 1600년(선조33)에 중건하였고, 1812년(순조12)에 다시 크게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지금의 건물은 당시의 것으로 보이며, 1945년 광복 이후로는 1969년에 향교의 전반적인 보수가 있었다. 원래 향교는 성현에 대한 제사와 후학에 대한 교육, 그리고 지역사회의 민풍교화(民風敎化)라는 세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향교에는 성현들의 훌륭한 덕을 기리기 위한 제사(祭祀) 공간과 기본적인 교육을 위한 강학(講學) 공간이 있었으며, 배우는 단계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닌 지역사회를 위해 적극적인 실천까지 포함한다. 강학공간은 명륜당(明倫堂)이고 제사공간이 대성전(大成殿)과 동·서무이다. 명륜당은 학생들에게 강의하는 강당으로 실내의 사면 벽에는 교육지침이나 향교의 연혁 및 중수기 등을 적은 글들을 걸어 놓고 있었고, 대성전과 동·서무에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의 역대 유현과 조선의 18현의 위패를 모셔놓고 매년 음력 2월, 8월의 상정일에 석전제(釋奠祭)를 지내고 또 매달마다 삭망제(朔望祭)를 올리고 있었다. 향교에 제사공간을 두고 정기적인 제사를 시행하였던 것은 이를 통해서 여기에 모셔진 유현들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고, 배우게 하고자 함에서 였다. 또한 향교에는 학생들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하여 기숙사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동·서 양재가 곧 그것이다. 회덕향교의 동·서 양재는 명륜당과 대성전 사이에 좌우로 배치되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소실되고 그 터만이 남아 있는데 오른쪽에 있으면 동재(東齋)로 이곳에는 수준이 높은 유생이, 왼쪽의 서재(西齋)에는 수준이 낮은 유생이 거처하였다.

향교의 학생 정원은 행정구역의 크기에 따라서 차등을 두었는데, 부(府)·대도호부(大都護府)·목(牧)에는 90명, 도호부(都護府)에는 70명, 군(郡)에는 50명, 그리고 현(縣)에는 30명으로 각각 규정하고 있었다. 또한 향교 교관의 법정 인원으로는 각 향교에 1명의 교관을 제수토록 하였고, 주·부·목(州府牧)에는 종6품의 교수 1인이 있었고 500호 이상의 군·현(郡縣)에는 종9품의 훈도 1인을 두고 관찰사로 하여금 감독케 하였다. 또한 500호 미만의 작은 고을에는 학장을 두었고 향교마다 교장, 제장, 장의, 색장, 유사, 재임과 교노 방자를 두었다. 나라에서는 향교의 재정 운영을 위하여 학전(學田) 5∼7결을 지급하고 그 수세로써 비용에 충당케 하였다. 그러나 이 외에 지방민으로부터 징수 또는 토지의 매수 등을 통하여 많은 전지를 소유한 향교도 적지 않았다.

조선시대 향교의 위상은 중앙의 사학(四學)과 같았다. 여기에서 공부한 후 1차 과거에 합격한 자는 생원(生員)·진사(進士)의 호칭을 받고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할 수 있었다. 성균관 유생이 된 후에는 다시 문과(文科)에 응시하여 고급관위에 오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에는 향촌사회에 서원이 크게 성하게 됨에 따라 향촌 사대부 자제의 교육이 주로 서원에서 이루어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서 향교의 교육기능은 상대적으로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향교의 제사 기능만은 중시되었고, 그것은 현재까지도 연연히 계승되고 있다. 당대를 주름잡던 정치가, 행정가들이 이곳 회덕향교에서 배출되었다. 그들은 조선조의 후반부를 하나의 학파로 묶는 역사를 창조하기도 하였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리 역사의 커다란 획을 그었고 그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역사 문화환경'이다. 회덕향교의 대성전은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5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