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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족산성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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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19-04-25 14:24 조회1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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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_arrow.gif계족산성 유적

title_02.jpg 

1. 건물지(建物址)
 

01-1.jpg계족산성 내부의 평탄면 곳곳에는 대략 10여 개소 이상의 건물지가 존재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조사지역은 북벽(北壁) 부근의 약1,200평에 달하는 고지대인데 이곳은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건물지가 존재하였음이 밝혀졌다. 현재 가장 잘 남아 있는 건물지는 고려시대에 축조된 제1건물지와 제2건물지이다.
고려시대 건물지에 선행하는 삼국시대 후기∼통일신라시대의 건물지도 부분적으로 확인되나 유존상태가 양호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세한 조사를 위해서는 고려시대 건물지를 제거하여야 하기 때문에 금번 조사대상에서는 제외하였다.

(1) 제1 건물지01-2.jpg
고려시대 건물지는 표토를 제거하자 마자 흑색부식토 면에서 바로 노출되었다. 이 건물지는 담장과 건물기단을 비롯하여 문지와 계단, 부석(敷石)을 깐 보도(步道) 등의 시설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잘 남아 있었다. 초축 후에 기단 네 면을 모두 확장·개축한 최후의 건물 규모는 15.8×6.8m의 크기에 정면 2∼3칸, 측면 1칸의 구조를 하고 있다. 내부에서는 12∼13세기로 볼 수 있는 청자편, 토기편들과 함께 다수의 명문와(銘文瓦)도 출토되었다.


(2) 제2 건물지
제1건물지의 서편에 나란하게 연접하게 축조된 것으로 단벽이 되는 북쪽 기단이 제1 건물지 북쪽 기단보다 남쪽으로 약 2m 가량 들였으나 제1 건물지와 "「 "자 형을 이루도록 배치되어 있다.
제2 건물지 역시 여러 차례 개축되었는데, 최후의 건물지는 제1건물지의 최후 건물지 보다 축조가 늦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출토 유물 상으로 보면 절대 시간차는 크지 않아 제1건물지와 시종 공존한 것으로 보아도 좋다. 건물의 자세한 구조는 중복이 심하여 파악이 어려우나 최종 건물을 기준으로 하면 기단 규모 14×7.1m에 정면 5칸, 측면 1칸 가량 되며, 북쪽 부분에는 온돌 구조가 정연하게 남아 있다.
최후 건물 축조 시기는 제1건물지와 비슷한 12∼13세기로 판단된다.

(3) 성벽(북벽)내부 퇴적토 트렌치 조사
제1·2 건물지와 함께 제1건물지에서 동쪽으로 20m 떨어진 지점의 건물지는 적심(積心)만 일부 확인되었기 때문에 건물의 상세한 구조를 밝히기는 어렵다. 한편 이 부분에서 북쪽 성벽과 직교하는 폭 2.5m, 길이 5m의 트렌치 조사를 실시하여 성벽축조 시점 및 양상을 파악하고자 하였으며 조사결과 성벽 축조는 협축(夾築)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생토면 바로 위에서 1.5m 가량 할석을 이용하여 석축을 형성한 후 7∼8 차례의 내부 다짐을 하였으며 그 위에 정연하게 성벽을 쌓아 올리는 방법으로 축조하였다. 다짐토 상면에는 목탄면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바로 위층의 황갈색 사질 점토층에서 완형토기 1점이 출토되었다.

(4) 출토유물

1) 토기 및 자기류
계족산성 내 건물지에서 출토된 토기들은 주로 고려시대의 완, 동이, 병 등이 있으며, 자기류는 순청자 및 상감청자들로서 완이나 잔, 병 등이 주요 기종을 이루고 있다. 완이나 잔탁의 경우 고급기종도 일부 출토되었으며 청자편 중에는 "량온납(良 納)"이란 명문이 새겨진 것도 1점 출토되었다. 성벽내부 퇴적토 트렌치의 다짐토 상면에는 적갈색연질의 완( )이 1점 출토되었다. 한편 여러 곳의 고려시대 건물지 아래 내부 퇴적토에서 6세기 중, 후반∼8세기로 편년되는 삼각집선문(三角集線文), 점열문(點列文) 및 인화문(印花文) 등이 시문 된 뚜껑 편을 비롯하여 단각고배(短脚高杯)나 부가구연장경호(附加口緣長頸壺),완( ) 등 신라시대 유물이 출토되었다.

2) 기와류01-3.jpg
출토된 기와는 주로 선조문(線條文), 격자문(格子文), 어골문(魚骨文) 계통으로 구분될 수 있는데 어골문 기와에서는 많은 양의 명문 와가 출토되었다.
층위 및 시기에 따라 대략 3단계로 분류 될 수 있다.

◎ 1단계
고려시대 건물지 축조면 아래에서 출토된 것들로는 선조문이 주종을 이루고 명문이 있는 기와는 확인되지 않았다. 1단계 기와는 저수지에서 출토된 단각고배 등과 공반되고 있어 6세기 중엽 이후의 삼국시대 말∼통일신라시대로 편년이 가능하다.

◎ 2단계
1단계 기와와 마찬가지로 고려시대 건물지 아래의 황갈색 사질점토층에서 출토된 것들로 전형적인 어골문과는 달리 집사선문을 서로 엇물리게 시문한 것과 격자 간격이 3∼5㎝ 넓은 사격자문에 종 방향의 직선이 결합된 기와들이 대부분이다. 이들 가운데 전자에 해당하는 기와는 거의 대부분 "우술(雨述)"이 찍혀 있는 명문와이다. 2단계 기와는 다음 3단계에 해당하는 고려시대 기와들이 거의 대부분 환원소성으로 두께가 두꺼운 편인데 반해서, 산화소성품이 절반정도를 차지하고 있으며 와벽이 상대적으로 얇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것은 후술할 2차 저수지에서도 출토되었다.

◎ 3단계
전형적인 어골문 기와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형태상의 특징 및 공반된 청자 등을 통해 11∼13세기로 편년 되는 것들이다. 제1·2 건물지를 비롯하여 건물지 여러 곳에서 출토되는데 "우술(雨述)", "우술천국(雨述天國)", "진양도인육회(棟梁道人六 )" 등의 명문 와가 포함되어 있다.

3) 기 타
이밖에도 철제 말을 비롯하여 철제 솥, 쇠스랑, 따비, 못 등의 철제품과 동경 등이 출토되었다. 

 

 

2. 저수지(貯水池)
 

01-4.jpg성내의 저지대인 동쪽 성벽 중간 부분(표고 366m)에 위치하고 있다. 최초 저수지의 전체 평면형은 대략 타원형으로 되어 있으나 그 후에 축조된 2차 저수지의 평면형은 장방형으로 되어 있다.

(1) 1차 저수지
호안석축(護岸石築)은 급경사를 이루는 북쪽과 서쪽에는 3단으로 단축(段築)하여 각 단 상면(床面)에는 판상석(板狀石)으로 부석(敷石)하는 방식으로 하고 경사가 상대적으로 완만한 남쪽 및 동쪽의 남단부는 2단 또는 1단으로 처리하였다. 기술의 편의상 최상부 석축부터 아래로 제1석축, 제2석축, 제3석축이라 하였다.
제1석축과 제2석축은 직접 저수되는 호안(護岸)으로서의 기능보다는 사면 침식을 막기 위한 기능을 하고 있으며 마지막 제3석축은 저수지의 호안이 된다.
1차 저수지의 규모는 외곽 석축에 해당하는 제1석축의 경우 38×21m 크기의 타원형을 이루며 실질적으로 물이 저수되는 부분의 제3축 부분은 32×15m 가량 된다. 저수지의 깊이는 아직 내부 퇴적토 조사가 완료되지 않아 확실치 않으나 현, 제3석축의 높이를 감안하면 최소 2m 이상이다.
후술할 2차 저수지 축조 시 1차 저수지의 제1∼제3석축 위에 채워 넣은 충진토(充塡土)에서 다량의 유물이 수습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단각고배를 비롯해 부가구연장경호구연부 및 대각편, 단경소호, 완 등 대체적으로 6세기 중반 내지는 후반의 신라후기 토기들이다.

(2) 2차 저수지
1차 저수지의 제1·2·3석축 내부를 토석(土石)으로 메우고 평면 규모를 축소한 2차 저수지는 19×8m의 장방형으로 깊이는 약 5m 가량 된다. 호안석축은 1차 저수지의 수직석축과 달리 아래에서부터 물려 쌓기하여 구조적인 안정을 도모하였으며 외곽부분은 1차 저수지의 제1·2석축 위에 토석을 채워 완만한 경사를 유지하도록 하였다.
2차 저수지의 내부 퇴적토는 상부에는 황갈색 사질토이나 그 아래에는 회흑색 사질점토 성분의 뻘층을 형성하고 있다.
2차 저수지의 폐기는 내부 퇴적토의 양상으로 보아 어느 시점에 인위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매립 토에서 출토된 유물이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토기나 기와 편들이며 고려시대의 청자는 전혀 없는 점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후대에 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3) 성벽(동벽)내부 퇴적토 트렌치 조사
성벽과 접해 있는 저수지 동쪽 석축부분에 대한 트렌치 조사결과 성의 동벽은 협축을 이용하여 축조되었으며 성벽의 높이는 9.5m에 달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한편 생토면에 접하여 약60∼80㎝ 가량의 뻘층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는데, 층위 상으로 보아 1차 저수지보다 선행하는 최초의 저수지가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으나 현재로선 확실치 않다.

(4) 출토유물01-5.jpg
저수지의 호안석축 내부 및 외부에서 출토된 유물은 기와류와 토기류가 대부분이다. 기와는 선조문 및 굵은 격자문이 시문 된 것들이 주종을 이루는데 문양이나 정면수법 등으로 보아 건물지 조사시 출토된 것들과 동일하다.
2차 저수지의 석축상면에서 건물지 제2단계 기와에 해당하는 "우술(雨述)" 명기와가 3점 출토되었으며, 내부 뻘층에서는 대부분 선조문 기와들이 출토되었다.

토기는 단각고배, 부가고연 장경호, 소형 완, 합, 호가 대부분으로 동체부에 각종 음각기호가 있는 것이 많은데 이들은 신라후기 양식 토기들의 특징들이다. 그 밖의 8세기 중엽경의 인화문 토01-6.jpg기도 확인된다. 이로 보아 여기 출토토기의 편년적 위치는 삼국시대 말∼통일신라시대에 걸친 6세기 중, 후반∼8세기대로 판단된다. 그밖에 뻘층에서는 박으로 만든 용기 및 농공구의 자루 등과 함께 복숭아씨, 말 이빨, 다슬기 등 다수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3. 봉수대(烽燧臺)
 

01-7.jpg(1) 유구
봉수대(烽燧臺)는 해발 428∼430m에 이르는 남문지 부근 능선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할석을 이용하여 장축 45.7m, 장폭 22.8m의 외곽석축을 쌓고, 그 내부에 성의 동벽 쪽으로 길이 11m, 폭 5.2∼7.8m인 사다리꼴의 봉돈부(烽墩部)를 조성하였고, 중앙부분에 12×9.8m의 내부 석축을 둘러 봉군(烽軍)들이 기거할 건물지를 배치하였다. 그리고 내부 석축의 남쪽 중앙부분에 접해서 폭 1.3m, 길이 7.8m 가량의 출입구시설이 남아 있다.
한편 내부석축 부분에 탐색 조사를 실시한 결과 약 60㎝ 아래층에서 석렬이 확인되었고 이 층에서 삼국∼통일신라시대의 기와 및 토기 편들이 출토되었다.

(2) 출토유물
봉수대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조선시대 백자, 옹기, 기와 편들과 함께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의 기와 및 토기들이다. 백자나 옹기 등은 봉수대와 직접적으로 관련있는 유물들로서 주로 18∼1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많은 양을 차지하는 대부분의 유물들은 건물지나 저수지에서 출토된 것들과 동일한 것들로 봉수대와는 관련되지 않는다. 

 

 

계족산성 2차 조사
1. 남문지(南門址)
 

01-8.jpg계족산성의 남문지는 등산로로 이용되어 오던 곳으로 초목이 무성하여 단지 성벽이 절단되어 있는 점으로써만 이곳을 문지로 인식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발굴조사는 성벽의 절단 지점 및 성벽 안팎의 퇴적토를 제거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그 결과 표토 바로 아래에서 문주초석(門柱礎石)으로 보여지는 대형의 석재가 각각 성벽 절단부의 양편에 놓여 있음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성 외부로 이어지는 절단부의 통로상에는 외부로 경사진 지형을 따라 계단상(階段狀)의 부석(敷石)이 드러났다. 이 문지는 선행하는 문지의 동쪽부분의 성벽을 안으로 약50∼60㎝ 가량 좁혀 쌓은 성문 석축과 관련된 것으로서, 초석과 계단면 하부에서 출토된 어골문계 와편(魚骨文系 瓦片) 및 청자편(靑磁片)으로 보아 대략 11세기 이후 어느 무렵에 사용된 후대의 성문시설임을 알 수 있었다.
2차 조사 목적이 삼국시대 초축 시점(初築時點)의 문지(門址) 구조 파악에 있었으므로 고려시대의 것으로 확인된 이 문지 시설은 조사 후 제거하였다. 이어서 하강 굴토조사를 실시한 결과 처음 축조 후 연이어 사용된 3차례의 사용면이 중첩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각 사용면에는 배수구(排水口), 부석(敷石) 등의 구조물과 함께 와편(瓦片) 등의 유물이 집중 출토되는 소토면(燒土面)이 나타나 한 때의 사용 면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편의상 최초 사용면으로부터 차례로 제1차 사용면, 제2차 사용면, 제3차 사용면으로 명명하였다.

(1) 문지(門址) 및 외부시설
남문지(南門址) 일대의 성벽은 기반지형을 축성에 적당하도록 정면한 다음 판상 할석을 쌓아 축조하였다. 축조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문지의 동쪽 성벽의 성 내부에 접한 부분에 탐색 갱을 설치 조사하였다. 그 결과 이 부분은 최초의 사용면 약2m 아래부터 성벽을 쌓아 올라와 점성이 강한 점토와 사질토를 번갈아 다져 쌓아 성의 기부(基部)를 견고히 하였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성벽의 외부는 수직(垂直)을 이루고 있는 본 성벽에 잇대어 이를 보강하기 위한 부축(補築)이 설치되어 있는데 문지(門址)의 동쪽 부분에는 2단, 서쪽 부분은 최소 3단 가량의 보축(補築)이 남아 있다. 이들 보축은 축성 당초에 설치한 것임은 성벽에 사용된 석재의 엇물린 상태로써 확인 가능하다. 이와 같은 다단 보축(多段補築)은 보은지역의 삼년산성 서문지(報恩 三年山城 西門址)에서도 확인된 바 있는데, 문지에 설치된 이러한 보축은 본 성벽을 보강하는 기능과 함께 성외로의 돌출부 즉 일종의 적대(敵臺)와 같은 부수적 역할도 염두에 두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문지 동쪽부분 성벽의 외부 굴곡상태에서 간취되는데, 동 성벽이 일직선으로 서진(西進)하다가 문지 동쪽 약 30여m 지점에서부터 급격하게 밖으로 불룩하게 돌출 되도록 보축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지의 통로부분은 전술한 것처럼 3개의 사용면이 중첩되어 있다. 1면과 2면에서는 부석면(敷石面) 아래 판상석으로 만든 배수시설이 확인되었다. 이 배수구와 연결되는 시설은 성 내부로 연결되어 있는데, 제 1면의 경우 성내부의 물이 집수(集水)되어 배수구로 배출되게 하는 우물형태의 집수정(集水井)이 마련되어 있다. 집수정의 크기는 직경 약 1m 안팎, 깊이는 약 0.6m 가량 된다. 그러나 좌우의 내황(內滉)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집수하는 시설은 확인되지 않고 있는데, 동쪽부분의 경우 공극(空隙)이 많은 퇴석부(堆石部)가 확인되는 점으로 보아 일종의 맹암거(盲暗渠)형태로 처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제2면의 경우는 통로부에서는 배수구가 확인되었으나 제1면과 같은 성 내부의 집수시설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리고 제3면에서는 통로부의 배수구도 보이지 않아 성벽의 돌틈 사이로 스며드는 자연배수에 의존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통로부의 남단, 즉 진입부는 약 0.5m의 단차(段差)가 있는 석축으로 마감하였는데 이 단축부(段築部)는 서쪽 성벽의 외부 보축부 3개 가운데 최상단(제3단)과 연결되고 있다. 그러므로 서 성벽 외부의 보축부는 성 내부 진입시의 계단 역할도 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하단(제1단)에는 명확한 계단시설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석축의 상태로 보아 진입계단에 해당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부분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동 성벽의 외부는 전술한 것처럼 일종의 적대와 같은 역할이 가능하도록 외부로 돌출한 보축부가 있으나 진입부에 가까운 부분에까지 이것이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보축이 없는 이 부분에는 높이가 앞의 보축보다 낮은 보강석열(補强石列)이 있는데, 성벽에 바로 연접해 있는 상단(上段)과 여기서 다시 약 5m 가량 떨어진 아래지점의 하단(下段)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단과 하단 사이는 점토로 피복(被覆)하여 경사를 이루도록 하였다. 이 상면(床面)에서 소토(燒土)와 함께 다량의 와편(瓦片)이 노출되었다. 여기의 기와들은 대부분 선조문(線條文)이 타날된 것들로 후술하는 하단 석렬 내부 탐색 갱에서 출토되는 무문와(無文瓦)와 명확히 구분된다.01-9.jpg
하단 석렬은 전술한 서쪽 부분의 외부 보축 제1단과 교차되고 있는데 탐색, 조사결과 서 성벽 외부 제1단이 축조된 이후 얼마간 경과된 시점에 동쪽 하단 석렬이 추가되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로 미루어 동쪽 보강 석렬은 당초에는 상단만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상단의 석렬은 아래로 계속 이어지고 있어 당초의 높이는 약 2m 가량이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석렬의 기부상면(基部床面)에서는 다수의 무문와(無文瓦)와 함께 단경호의 저부편 등 토기편이 출토되어 하단 석렬이 축조된 시점이 대략 6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된다.

(2) 성 내부 시설물
성 내부에 대한 조사는 성내에서 문지(門址)로 이어지는 지점을 대상으로 실시되었다.
조사결과 전술한 문지 통로부에서 확인된 3개의 사용면에 대응하는 각각의 구 지표면(舊地表面)이 노출되었다. 최상부의 3차 면에는 통로부 동쪽벽면에서 성내로 연장되는 석렬이 확인되었을 뿐 특별한 시설물은 없었다. 이 석렬은 내황부(內湟部)와 통로부를 나누는 경계부분에 해당되고 있어 당초에는 이와 대응되는 서쪽부분에도 이러한 석렬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확인되지 않았다.
2차면은 3차 면에서 약 0.6m 아래에서 확인되었고 서쪽부분에서 작은 할석면이 노출된 것 이외 정형성이 있는 시설물은 드러나지 않았다.
최초의 사용면인 1차면은 다시 2차면 보다 약 0.5m 지점에서 확인되었다. 1차면은 문지로부터 성 내부 약 2.5m 지점까지 문지와 동일하게 판석으로 부석(敷石)되어 있었다. 이 면의 서쪽부분에서 위의 제3면 동쪽부분에서 확인된 것과 마찬가지로 내황부와 통로부를 구분하는 석단(石段)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석단의 내부 즉, 통로부 쪽 성벽하단에 호(壺) 1개체가 매납되어 있었다. 제1면에는 위에서 이미 말한 것처럼 통로부의 배수구와 연결되는 성재부의 집수정이 노출되어 당시 배수 처리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자료가 되고 있다. 동벽이 내부에서는 성벽을 따라 약 2m 폭의 내황(內湟)이 설치되어 있었다. 최후면의 내황은 석축으로 황안(湟岸)을 만들었으나, 하강 조사 결과 최초에는 석축없이 단순 요면(凹面)을 이루고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내황 내부에 퇴적이 이루어지면서 기저면(基底面)이 점차 높아짐에 따라 최후 시점에 와서는 석축으로 내황을 구획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3) 출토유물
남문지의 내부와 진입부에서 출토된 유물은 기와류와 토기류가 대부분이다. 최초의 사용면에서는 주로 측면을 정면(整面)한 문무와가 주종을 이루고 있으나 진입부의 동쪽 성벽 보강 석단의 하단이 축조된 이후 사용면에서는 승문(繩文) 또는 대부장경호(臺府長頸壺), 개(蓋), 고배(高杯) 등이 대부분으로 모두 6세기 중·후반∼9세기에 걸친 신라토기들이다. 특히 최하층에서는 단각고배, 단경호대부장경호, 완류의 편들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계족산성과 인접한 주산동 고적군 및 금산 장대리 고적군 등 6세기 중·후반경의 신라고분 출토품과 동일하다.
이로써 보면 1차 저수지의 축조시점과 남문지 제1면의 사용시점이 동일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계족산성의 초축 시점이 6세기 중엽 경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고 있다. 한편 제3면은 후대 문지 축조를 위해 동쪽부분 성벽을 좁혀 쌓은 성벽의 내부에서 출토된 사각면 편호(四角面偏壺) 및 청자편으로 보아 대략 11세기 무렵까지 유지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실제 이 무렵까지 사용되고 있었는지 여부는 이 출토자료만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아마도 사각면 편호를 비롯한 9세기대의 유물의 존재로 미루어 제3면의 사용시점은 대략 후삼국시대까지 이어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98년도 조사결과 제2차 저수지의 축조가 대략 8세기 중·후엽 경으로 비정되는데 이러한 저수지의 개축은 성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전면적 개보수의 일환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남문지 제3면 역시 이 무렵과 관련될 것으로 잠정할 수 있다.
제2면의 실연대를 알려주는 직접적인 자료는 없으나 전술한 것처럼 제1면이 6세기 중반 경이므로 대략 7세기 대에 비정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유물이 보주형(寶珠形) 꼭지가 달린 합(盒) 뚜껑이다. 이 유물은 내황부 노출과정에서 출토되었으므로 제2면과 직접 관련되는 것은 아니나 그 시기가 7세기대로 볼 수 있다.  

 

 

2. 1차 저수지
 

98년도 조사시 호안(湖岸)이 단축(段築)으로 된 제1차 저수지와 그것을 축소한 장방형의 2차 저수지가 확인된 바 있는데 이번 조사에서는 2차 저수지가 축조된 이후 폐기된 상태로 잔존하고 있던 1차 저수지의 북부지역을 대상으로 하였다.

(1) 유구(遺構)
1차 조사시 1단에서 3단까지의 호안(湖岸)석축이 확인되었는데 금번 조사에서는 제3단 호안석축 내부 퇴적토에 대하여 정밀 굴토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과정에서 제3단의 1.5m 아래 지점에서 새로이 제4 석축호안이 확인되었다. 이 4단은 북쪽과 서쪽에서는 수직 석축의 형태로 명확하게 나타나지만 동 성벽에 연접하고 있는 동쪽 부분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있어 이 부분에 수구(水口)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으나 더 이상 조사가 진행되지 않았다. 이로써 1차 저수지는 모두 4단의 호안석축으로 된 것임을 새롭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다단 호안석축(多段湖岸石築)을 가진 산성 내 저수시설(山城內 貯水施設)은 그간 확인된 바 없어 삼국시대 산성 저수시설의 축조기법을 알려주는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2) 출토유물
저수지내부 퇴적 토에서 목기 1점, 도구의 자료로 추정되는 목제품, 기둥형태의 목제, 식물 섬유질 및 얇고 가는 나무가지 등 다수의 유기질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 밖에 복숭아씨 등 식물씨앗, 말 이빨 등의 동물 뼈, 그리
고 다슬기 등 연체동물의 유체도 수습되었다.01-10.jpg
이 가운데 1차 저수지의 사용시점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유물은 토기들인데 이는 대부장경호(臺附長頸壺), 단경호(短頸壺), 단각고배(短脚高杯), 대부완(臺附碗) 등 이른바 신라통일양식 여러 기종의 파편들이다. 기형파악이 가능한 것을 중심으로 보는 한 대부분 토기의 제작 사용시점은 6세기 후반대로 비정된다.
그러나 발굴시점은 금번 출토토기만으로는 확정하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다. 조사대상이 된 1차 저수지의 잔존부분은 당초 저수지의 일부분에 지나치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 출토된 토기 가운데 가장 늦은 유물을 근거로 저수지의 폐기시점을 비정하는 것은 불안하다. 다만 전술한 남문지 조사에서 확인된 사용면과 관련하여 보면 대략 남문지 제3면 시점에 2차 저수지가 축조 된 것으로 판단되므로 1차 저수지는 8세기 후반 무렵까지는 존속하고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