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건물지(建物止) 상황 1) 1호 건물지 고려시대의 장방형 석축기단 건물지로 북벽과 동벽 기단은 이미 유실되었다. 잔존규모는 기단부의 동-서 장축이 9.2m, 남-북 단축이 6.5m이며 기단 상면이 후대 중복 및 경작 등에 의해 극심히 파괴되어 초석과 적심석의 형태는 찾을 수 없었다. 건물의 기단은 자연 경사면으로 그대로 이용해 지름 30∼60㎝ 크기의 할석을 막돌쌓기 수법으로 2∼3단 정연하게 쌓았고 경사 아래쪽인 기단 서단부 내부는 일부 잡석 다짐을 한 후 회갈색 사질의 기단토를 채웠다. 기단 북벽은 2호 건물지의 남변석렬이 축조되면서 파괴되었고 주변의 2호, 7호 건물지 보다 전체적인 수준이 낮아 1호 건물지가 이 일대 건물지 중 가장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은 대부분 기단 바깥쪽에서 출토되었으며 소문, 음각, 양각, 상감 등 다양한 기법의 청자편과 토기편, 철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기와는 평기와류가 대부분이며 외면에 굵은 사격자문, 선조문, 어골문, 복합문 등이 시문되었다. 2) 2호 건물지 유적의 중앙부에 비교적 넓게 자리잡고 있으며 건물지의 전체적인 평면형태로 보아 'ㅁ'자형 건물지로 추정된다. 건물지 중앙에는 장방형의 석축기단이 서로 내면을 바라보며 길게 이어져 건물 내부 공간을 형성하고 있으며, 건물의 바깥기단은 건물 서편에 내부 기단 석렬과 평행하게 일렬로 길게 이어져 있다. 내부 기단석렬은 다시 서변이 안쪽으로 좁혀져 있으며 서변 기단의 남쪽 끝과 남변기단과의 사이 간격이 2.54m로 떨어져 있어 이 부분에 건물 내부로 통하는 출입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내부 기단석렬의 잔존규모는 북변 9.0m, 동변 13.1m, 남변 10.3m이며 안쪽으로 좁혀 축조된 서변기단은 5.22m가 남아 있으나 2호 건물지가 폐기된 후 건물의 중심부에 5호 건물지가 축조되면서 상당부분 파괴되었다. 이 서변 기단은 4호 건물지 동편기단을 파괴하고 축조되어 있어 4호→3호→5호 건물지 순으로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내부 기단석렬과 외부 기단석렬 사이공간은 폭이 대략 5.6m 정도로 이 부분에 실제 건물이 세워져 있었을 것이나 후대 유구가 중복되고 발 경작 등에 의한 파괴가 극심해 초석이나 적심석렬은 찾을 수 없었다. 출토유물은 대부분이 청자편이며 선조문, 복합문 등이 시문된 기와편이 상당량 출토되었다. 3) 3호 건물지 유적의 북동부에 위치하며 여타의 건물지들과 중복없이 비교적 잔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며 건물의 잔존형태는 방형에 가까우나 동변 석축 기단이 없이 대지가 'T'자로 삭토되어 있어 전체 형태는 'T'자형 건물지로 추정된다. 건물의 상면에 초석과 적심석이 일부 남아 있으며 도리칸 2칸, 보칸 3칸이 확인되었고 보칸은 중앙 칸이 넓고 좌·우 협칸이 좁은 모양이다. 도리칸의 간격은 3.24m이고 보칸은 중앙칸이 3.24m, 좌·우 협칸이 1.7m이다. 기단은 북변이 9.06m, 서변이 8.24m, 남변이 7.48m이며 기단석렬이 축조될 부분만 삭토하여 1단 기단석을 일렬로 쌓고 2단 석렬 이상은 약간 들여쌓았다. 건물의 상면에는 다시 동-서로 긴 석렬이 북변 기단석렬과 평행하게 이어져 있으며 이 두 석렬 사이에 소토층이 와편과 뒤섞여 노출되어 건물이 후대에 좁혀 개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은 청자편이 대부분이나 상감기법 등은 보이지 않았다. 기단석렬 바깥쪽에서 선조문, 어골문, 복합문 등이 시문된 기와편이 상당량 출토되었다. 4) 4호 건물지 2호 건물지 내부 서변기단 석렬이 축조되면서 파괴된 건물지로 'ㄱ'자형의 북동부 모서리만 남아 있다. 약 20㎝ 전후의 자연할석을 안쪽이 마주 보이게 쌓았으며 이는 2호 건물지 내부 기단석렬의 축조 방식과 유사하였다. 그러나 유구의 대부분이 유실되어 전체 형태는 알 수 없으며 잔존규모는 북변이 4.3m, 동변이 1.0m 남아 있다. 5) 5호 건물지 2호 건물지 내부 기단석렬을 부분적으로 이용해 축조하였고 정면 도리칸 3칸에 보칸 1칸의 규모다. 도리칸의 간격은 2.28m이고 보칸은 1.96m이며 직경 90㎝ 정도의 적심석군만 남아 있다. 건물의 기단은 의도적으로 쌓은 흔적은 없으며 남변과 서변 기단만 부분적으로 막돌을 한단 쌓아 경계를 지었다. 건물의 동변에는 'ㄱ'자형의 암거시설이 돌려져 있으며 2호 건물지 내부 동쪽 기단석렬을 이용해 축조되었다. 규모는 폭 0.28m, 길이 3.54m, 높이 0.24m이고 편편한 자연할석을 바닥에 깔았다. 출토유물은 청자편, 토기편, 기와편 등이 주로 출토되었으나 유구 주변의 교란이 심해 5호 건물지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유물을 따로 구분하긴 어려웠다. 6) 6호 건물지 6호 건물지는 7호 건물지의 북쪽에 위치하며 7호 건물지의 동변 기단석렬 위에 축조되었고 동편에 위치한 2호 건물지 보다는 먼저 축조된 것으로 확인된다. 건물의 잔존형태는 남변과 동변 기단석렬 일부만 남아 있어 전체적인 형태를 알 수 없고 상면도 상당부분 삭토되어 있어 적심석 조차 남아 있지 않다. 잔존규모는 남변 기단이 4.65m, 동변 기단이 6.6m이다. 7) 7호 건물지 1호 건물지의 서쪽에 위치하며 도리칸 3칸, 보칸 1칸의 규모다. 도리칸의 간격은 4.33m, 보칸은 3.35m이며 직경 90㎝정도의 대형초석이 놓여있다. 초석과 초석 사이는 건물 내면을 면으로 쌓은 하방석렬이 놓여있고 건물내부 바닥에는 직경 40㎝ 정도의 편평한 자연할석을 정연하게 깔았다. 이들 초석 바깥으로 폭 1.54m 정도의 간격을 두고 기단석렬이 돌려져 있는데 서변 기단 석렬은 후대에 유실되었으며 북변 기단석렬은 6호 건물지 남벽 기단석의 하단에 맞닿아 있다. 건물의 용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일반적인 민가의 구조와는 규모나 형태 면에서 상이하며 내부공간을 활용했다는 점에서 창고 등의 특수시설로 추정된다. 출토유물은 대부분 청자편이며 음각, 양각, 상감기법 등이 주로 사용되었다. 건물 남변기단 바깥쪽에서 선조문, 복합문 등이 시문된 기와 퇴적층이 노출되었다. 8) 배수로 시설 3호 건물지 서북편에 근접해 있으며 3호 건물지 서벽 일부를 파괴하고 축조되었다. 수로의 길이는 12.8m, 폭은 0.56m로 좌·우 양쪽에 10㎝ 내외의 작은 자연할석을 이용해 석벽을 쌓고 바닥에 다시 편편한 할석과 기와편을 정연하게 깔았다. 수로내부에서 기와편 외에 특별한 유물을 출토되지 않았으며 수로의 북쪽과 남쪽 끝 부분의 모양도 상당 부분 파괴되어 알 수 없었다.
9) 기 타 6호·7호 건물지의 서편에 부정형의 석렬과 유물층들이 노출되어 있으나 근래에 농로가 개설되면서 파괴되어 원형을 찾기 어려웠다. 유적의 동남부에 부정형의 할석층이 노출되고 대형 초석이 하나 드러나 이 부근에 모종의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정형성이 전혀 없어서 원상을 짐작키 어려웠다. 또한 1차 발굴 조사시 드러난 2호 담장유구의 석렬도 북쪽으로 이어져 오다가 7호 건물지 부근에 다달아 그 흔적이 사라져 이번에 조사된 건물지 들과의 상관관계를 밝히지 못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