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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동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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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19-04-25 14:49 조회7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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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_arrow.gif오정동 유적

title_08.jpg 

1. 원 삼국시대 유적
 

(1) 1호 주거지(住居址)
오정동 유적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남쪽 주능선 상에 조성된 수혈주거지는 백제시대 1호 토광묘 남쪽 170㎝ 거리에 위치하여 있다.
잔존된 평면형태는 뒷벽인 북벽이 둥글고 좌·우측 벽은 길게 뻗어 내린 평면 'U'자형이며, 주거지의 장축이 능선방향을 따라 배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수혈벽은 화강암 풍화토를 수직에 가깝게 파고 조성되었는데 경사면 아래쪽에 해당되는 주거지의 남벽은 이미 유실되었고 이 부근의 바닥도 많은 부분이 유실되어 있었는데 그 규모는 남-북 잔존길이 412㎝, 동-서 너비 446㎝이며, 수혈벽의 최대 높이는 70㎝이다.
바닥층에서 대부분의 유물이 출토되었고 그 아래의 주거지 바닥에는 두껍게 층을 이루지는 않으나 회갈색 점질토가 얇게 깔렸던 것으로 판단되며 부분적으로 목탄편이 소량 섞여 있었다. 그리고 주거지의 내부에 노지의 연통부와 오늘날의 부뚜막 구조와 비슷한 터널형 노지가 설치되어 있었다.
연소부는 좌·우에 점토로 벽과 천장을 쌓아 올린 구조로 판단되는데 조사 당시 연소부의 앞쪽 천장은 이미 무너진 상태였고 연통부와 이어진 뒷벽은 천장이 남아 있었으나 토압(土壓)에 눌려 내려앉은 상태였다. 이 연소부의 중앙부 바닥에는 높이 23㎝ 정도의 길쭉한 강돌이 세워져 있었는데 이는 자비용기(煮沸容器)를 받치던 받침돌로 판단된다. 이 돌의 주변에서 경질무문토기편들이 노출되었는데 이는 자비용기의 잔편이거나 아니면 받침돌 위에 엎어놓았던 토기 구조물의 잔편으로 생각된다. 연소부와 연통부가 이어진 부분에는 내려앉은 청정 벽체 속에서 경질문무토기 외반구연옹 1개체 분이 노출되었다. 이 토기는 복원해 본 결과 결실된 부분이 많고 높은 열을 받은 듯 균열이 심하고 경화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 토기는 연소부의 천장을 축조할 때 점토와 함께 다져 쌓아 올렸던 것으로 판단된다. 아궁이와 연소부는 주거지의 동쪽 수혈벽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축조되었는데 이 사이는 적갈색의 점질토로 채워져 있었으며, 연소부의 천장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 위에서 철도자(鐵刀子) 1점이 출토되었는데 아마도 이 부분은 노지의 상면을 평탄하게 만들어 오늘날의 부뚜막과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유물은 주거지 북쪽 바닥과 노지 내부에서 소량이 출토되었고, 노지의 벽체와 굴뚝시설로 추정되는 구조물에서 점토와 반죽된 토기 편들이 수습되었다. 토기는 주로 경질무문토기 외반구연옹의 파편이 많았으며, 격자문이 타날 된 회색차질 단두대의 저부편 등이 주거지 바닥에서 출토되었다. 철기는 전술한 연소부와 동벽 사이의 점토구조물 상부에서 철도자 1점이 수습되었고, 석기는 없었다.

(2) 2호 주거지(住居址)08-2.jpg
2호주거지는 발굴조사구역내의 서북쪽 경사면에서 확인되었는데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주거지의 장축방향이 경사면 방향과 거의 직교한 횡타원형(橫楕圓形)이다. 수혈벽은 화강암 풍토석을 비스듬히 파고 조성되었는데 경사면 위쪽에 해당되는 북동쪽 장벽은 일직선에 가까우나 좌·우측 단벽은 둥글게 휘어져 있었다. 이 북동쪽 장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었으나 경사 아랫 쪽인 남서 벽은 이미 유실되었고 남동쪽 단벽(短壁)과 바닥도 많이 유실되어 있었다. 주거지 규모는 잔존길이 600㎝, 잔존너비 약 210㎝이고, 수혈벽의 최대 높이는 30㎝이다.
내부시설로는 기둥구멍 4개가 확인되었는데 북동쪽 장벽에는 직경 약 25㎝, 깊이 10∼15㎝의 원형 기둥구멍 3개가 120∼150㎝ 간격으로 1열로 설치되었다. 북서쪽 단벽 중앙부에는 직경 27㎝, 깊이 5㎝의 기둥구멍 1개가 수혈벽 바로 아래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 북서쪽 기둥구멍의 근처에는 직경 10㎝, 깊이 4㎝ 정도의 소형 구멍 2개가 확인되었는데 기둥구멍으로 시설되었는지에 여부는 분명치 않았다.
노지시설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주거지의 북서쪽 수혈벽 아래에서 경질무문토기편과 목탄 등이 섞인 점토층이 노출되고 부근의 수혈벽과 바닥에 일부 불맞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유구의 유실이 심해 뚜렷한 구조물은 남아 있지 않았으며, 구체적으로 노지 시설 여부도 판단하기 어려웠고 그 외 내·외부 시설로 확인된 것은 없으며 출입시설 등도 발견되지 않았다. 유물은 주거지의 북서쪽 수혈 벽 아래의 점토 층에서 경질문무토기 외반구연옹 1개체 분이 수습되었고, 북벽 중앙부 기둥구멍 근처에서 숫돌 1점이 출토되었다.

(3) 3호 주거지(住居址)08-3.jpg
2호 주거지의 동남쪽에 위치하며, 남쪽 주능선의 산등성이 상에 조성되어 있었다. 주거지의 북서쪽 수혈벽은 민묘와 중복되어 있었는데 최근 이장이 진행되면서 주거지의 대부분이 파괴되었으며, 남벽과 바닥은 그 이전에 자연 유실되어 있었다.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수혈벽의 대부분이 파괴되어 원형을 파악하긴 어려웠다. 잔존된 북벽과 동벽이 둥글게 이어지고, 민묘 이장부에 일부 남은 서벽의 노출 상태를 고려할 때 대체로 평면 반원형의 형태로 남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3호 주거지의 규모는 동-서 잔존길이가 505㎝, 남-북 잔존너비 280㎝, 수혈벽 최대높이 20㎝로 수혈벽은 화강암 풍화토를 비스듬히 파고 조성되었다.
주거지의 내부에서 노지시설은 확인되지 않았으며, 동벽 아래에 길이 123㎝, 너비 81㎝, 최대 깊이 30㎝의 타원형 구덩이가 수혈벽을 따라 길게 설치되어 있었다. 이 구덩이 바닥에서는 흑회색 단두대 구옹부편이 수습된 것 외에는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고 구덩이의 북쪽에서는 문무토기 동체편이 노출되었는데, 이 토기의 내부에는 구덩이의 것과 동일한 회갈색 점질토가 가득 차 있었다. 따라서 이 점토는 토기를 만드는데 쓰인 질흙(胎土)으로 볼 수 있으며, 구덩이의 용도는 이러한 질흙을 보관하던 저장(貯藏)구덩이로 추정된다.
기둥구멍은 북벽 아래에서 2개가 확인되었는데 기둥구멍의 크기는 직경이 10∼20㎝, 깊이는 7∼15㎝이며, 70㎝ 정도의 간격을 두고 설치되어 있었고 기타 주거지 내·외부 시설로 확인된 것은 없으며 출입시설 등도 확인되지 않았다.
유물은 저장구덩이의 내부에서 흑회색 연질 단경호의 구연부편이 출토되었고, 구덩이의 북편에서 앞서 설명한 경질 무문토기 동체편이 출토되었으며 주거지의 북벽 수혈선 부근에서 방추차(紡錘車) 1점이 수습되었다.

(4) 4호 주거지(住居址)
1호 주거지의 서남쪽 경사면에 조성되어 있었고, 4호 주거지의 동쪽에는 2호 수혈유구가 남쪽에는 11호 조선시대 수혈 주거지가 약 150㎝의 거리를 두고 위치하였다.
주거지의 서북 벽은 근래의 교란 구덩이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서남쪽 수혈벽과 바닥의 절반 이상은 이미 경사면을 따라 유실된 상태였다. 잔존된 수혈벽은 동북쪽 장벽(長壁)과 동남쪽 단벽(短壁) 일부가 확인되었는데 경사면 위쪽의 장벽은 직선적이며 단벽은 둥글게 돌려졌다. 따라서 원래의 주거지 평면형태는 확실치 않으나 대체로 장축이 산등성의 경사면 방향과 직교한 횡 타원형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4호주거지의 규모는 잔존길이가 560㎝, 잔존너비 160㎝, 수혈벽 최대높이 55㎝이며 수혈벽은 화강암 풍화토를 비스듬히 파고 조성되었다.
내부시설로는 기둥구멍이 확인되었을 뿐 노지 등의 특별한 시설은 없었고 불 맞은 흔적도 없었다. 기둥구멍은 수혈벽 바로 아래에 설치되었는데 모두 5개가 확인되었으며 기둥구멍은 90㎝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유물은 경질무문토기와 타날문토기 등의 토기류가 대부분이며 경질무문토기는 외반구연대 저부(外反口緣壺 底部)와 시루편들이 중앙부 바닥에서 주로 출토되었고, 둥근고리형 파수와 우각형 파수편(牛角形把守片) 등이 함께 출토되었다. 타날문토기는 단경호의 구연부편이 중앙부 바닥에서 출토되었으며 강돌이 몇 개 수습되었다. 동쪽 수혈벽 부근에서는 격자문이 타날된 단경호 동체와 저부편 등이 출토되었다. 주거지의 북편 바닥에서는 5∼12㎝ 길이의 길쭉한 강돌 4∼5개가 모여 있었는데 특별히 갈린 흔적은 없었다.

(5) 5호 주거지(住居址)
5호 주거지는 유적의 남쪽에 자리잡은 민묘의 동남쪽 경사면에 위치하며, 지표조사시 이미 주거지의 절반 이상이 중장비에 의해 파괴되어 단면이 드러난 상태로 발견되었다. 이 주거지는 조선시대 12호 주거지와 북벽의 일부가 중복되어 있었고, 주거지의 서북쪽 경사면 위에는 백제시대 2호 토광묘가 조성되어 있었다.
주거지의 평면 형태는 유실된 부분이 많아 분명치 않으나 경사면 위쪽에 해당되는 서북벽은 둥글게 돌려졌고 좌우측 수혈벽은 약간 직선적으로 뻗는 형태로서 반원형이었다.
주거지의 규모는 남-북 잔존길이 410㎝, 동-서 잔존너비 170㎝이다. 수혈벽은 화강암 풍화토를 경사지게 파고 조성되었으며 잔존 최대높이는 75㎝로 1호 주거지의 수혈 깊이와 비슷하였다.
주거지의 내부에서 작은 목탄편과 재층이 일부 노출되어 주거지 내부에 노지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잔존된 범위 내에서는 불 먹은 자리나 노지 등 구체적인 시설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리고 서북벽 아래에서 1개의 기둥구멍이 발견되었는데 직경 20㎝내외, 깊이4㎝ 정도로 바닥이 둥글게 파여졌다. 이 밖에 저장고, 출입시설 등의 기타 시설은 확인할 수 없었다.
유물은 경질 무문토기와 타날문토기 등의 토기류가 대부분이며 숫돌과 강돌 등 석기류가 소량 출토되었다. 경사면 위쪽에 해당하는 주거지의 서북벽 아래에서는 토기편들이 바닥에서 10∼15㎝ 정도 뜬 상태로 노출되었으나 중앙부 쪽의 바닥에서는 바닥면에 깔린 상태로 노출되었다. 이는 경사면 위쪽의 토사가 주거지 내부로 유입되면서 생긴 현상으로 판단된다. 출토 위치별로 살펴보면, 주거지의 서남쪽에서 회청색 경질 단두대와 경질문무토기 외반구연대 1개체 분이 노출되었고, 중앙부 바닥에서는 경질무문토기 심본형토기 1개체 분이 파손된 상태로 출토되었다. 심본형토기의 동쪽바닥에서는 경질무문토기 외반구연호 2개체 분과 고리형파수편, 우각형파수편과 회색연질의 타제문 토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숫돌은 경질 무문토기 저부편과 함께 주거지의 북쪽바닥에서 출토되었다.

 

 

 

2. 백제시대 유적
 

(1) 1호 토광묘(土壙墓)
1호 토광묘는 남쪽 주능선의 산등성 상에 조성되었고 남쪽에 1호 주거지가 위치하였다. 묘광(墓壙)의 장축은 경사면 방향과 직교하였으며 평면형태는 장방형이었다. 묘광의 규모는 길이 280㎝, 너비 145㎝, 깊이 45㎝이며, 화강암 풍화토를 상당히 경사지게 파고 조성하였다. 묘광 내부의 층위는 화갈색 사질토와 회갈색 사질점토가 양측 벽쪽에 있고, 그 중간에 회갈색 사질토로 이루어진 함몰선(陷沒線)이 노출되었다. 그 위로는 황갈색 사질토가 덮이고 표토 층에는 흑갈색 사질토가 다시 퇴적되어 있었는데 이 두 층은 분묘 축조와는 상관없는 후대 교란토층으로 판단되었다. 08-4.jpg이러한 토층의 단면 상태와 평면상의 토층 범위를 관찰한 결과 묘광의 가운데에는 목관이 안치되고, 목관과 묘광 사이는 황갈색과 회갈색의 사질토가 충진된 것으로 판단되며 목관의 규모는 길이 190㎝, 너비 45㎝이다.
목관의 내부에 부장된 유물은 없었으며, 목관과 묘광 서쪽벽 사이의 충진토 상에 조족문(鳥足文)이 타날된 난형호(卵形壺) 1점, 소형단두대(短頸壺) 2점, 완( ) 1점, 개배(蓋杯=뚜껑접시)) 1점이 부장되어 있었다. 이 중 난형호는 목관선 안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남쪽의 완과 약간 겹쳐 있었으며 철기류(鐵器類)는 출토되지 않았다.

(2) 2호 토광묘(土壙墓)
남쪽 주능선의 아래쪽에 자리잡고 있는 2호 토광묘는 이장되지 않은 민묘와 원삼국시대 5호 주거지의 사이에 위치하였다. 묘광(墓壙)의 중앙부와 남쪽 바닥은 근래에 구덩이가 파여지면서 교란되었으며 묘광의 형태는 장방형으로 장축이 경사면 방향과 직교하였다. 묘광의 규모는 길이 320㎝, 너비 150㎝, 잔존최대 길이 38㎝로 화강암 풍화토를 경사지게 파고 조성되었다.
묘광의 내부에는 목곽(木槨)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판단되는데, 목곽 내부에 함몰된 회갈색 사질토와 목곽과 묘광 사이에 충진된 황갈색 사질토의 범위가 평면상에서 확인되었다. 이를 통해 본 목곽의 규모는 너비가 96㎝, 길이는 250㎝ 내외로 추정되는데 교란부의 범위가 넓어 분명치 않았다. 목곽내에 목관이 안치되었는지에 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다.08-5.jpg
유물은 묘광의 북쪽 목곽선 내에 부장되어 있었고, 철기류를 포함해 모두 묘광 바닥에서 약간씩 뜬 상태였다. 목곽 내부 북쪽에는 회청색 단두대와 완( ), 소형 장두대 등의 토기가 놓여 있었고, 소형 장경호의 남쪽에서 철겸(鐵鎌) 1점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회청색 단경호의 남쪽 교란부 근처에서는 소형 단두대(短頸壺)와 철족편(鐵鏃片)이 출토되었는데 소형단경호는 구연부의 일부가 파손되었고, 철촉은 절반 이상이 결실된 상태로 출토되었다.

 

 

3. 조선시대 유적
 

(1) 주거지(住居址)

1) 6호 주거지
6호 주거지는 유적지의 북쪽, 녹지조성구역과 인접한 곳에 위치하며 산등성의 정상부에 조성되어 있었고, 주거지의 동서 벽과 전면부 바닥은 자연경사를 따라 유실된 상태였다.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전체적으로 말각방형(抹角方形)이었던 것으로 판단되나 경사면 위쪽인 주거지의 북벽은 비교적 둥글게 돌려졌다.
주거지 규모는 동서 길이가 350㎝, 남북 잔존너비 260㎝, 수혈벽 최대높이는 35㎝이다. 수혈벽은 화강암 풍화토를 경사지게 파고 조성되었으며 바닥으로 완만하게 이어졌다.
내부시설로는 북벽의 중앙부에 작은 화덕시설이 만들어져 있었다. 화덕시설은 북벽을 반원형으로 둥글게 파내어 굴뚝을 만들었으며, 그 입구의 주변은 붉게 소결(燒結)되어 있었다. 굴뚝의 입구 부분에는 목탄편이 노출된 외에 별다른 시설물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화덕시설의 동쪽에 직경 20㎝, 깊이 5㎝의 얕은 구멍이 하나 파여 있었다. 기둥구멍은 모두 4개가 확인되었는데 직경 6∼12㎝, 깊이 5㎝ 내외의 소형으로 서벽과 북벽 아래에서 조사되었으며, 앞서 설명한 화덕시설 동쪽에 파여진 구멍이 기둥구멍 인지의 여부는 확실치 않았다. 유물로는 분청자편(粉靑瓷片)과 백자편(白瓷片), 옹기편(甕器片)등이 주거지 바닥과 벽선 아래에서 소량 출토되었다.

2) 7호 주거지(住居址)
7호 주거지는 유적지의 북편에 위치하며 1호 건물지의 북쪽 경사면 위에 조성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수혈주거지 중에서는 잔존상태가 가장 양호하여 주거지의 평면형태가 온전하게 남아있었고, 출토된 유물의 양도 가장 많았다.
평면형태는 말각방형(抹角方形)으로 주거지의 남쪽 전면부에도 벽이 서 있었고 동남쪽 수혈벽은 일부 유실되었다. 주거지의 규모는 동서 길이 370㎝, 남북 너비 330㎝, 수혈벽 최대높이 40㎝로 화강암 풍화토를 경사지게 파고 조성되었다. 주거지의 북벽에는 수혈벽을 둥글게 파내어 굴뚝을 만든 화덕시설이 있었다. 굴뚝 내부에서 목탄편과 옹기편 등이 노출되었다. 굴뚝의 입구는 주거지의 바닥보다 약간 낮았으며 주변이 붉게 소결되고 재층이 얇게 깔려 있었다.
기둥구멍은 확인되지 않았으며 주거지의 북편에 북벽과 잇대어 원형구덩이가 파여져 있었고 이 구덩이 내부에서 옹기편이 수습되었는데 전체적인 규모와 유물 출토상황으로 판단할 때 저장용기를 묻어 두었던 저장구덩이로 추정된다. 유물은 주거지의 전면에서 노출되었는데 분청자와 백자, 옹기편 등이 상당량 출토되었다.
그리고 내부 출토품은 아니나 주거지의 서쪽 경사면에서 '배'(裴)자로 추정되는 명문이 상감된 분청자 대접의 저부편이 수습되었다. 주거지 내외부에서 유물들은 다른 수혈주거지에 비해 양이 많은 편이나 기종 구성이단순하고 기형이 거의 유사하였다

3) 8호 주거지
7호 주거지의 동쪽에 위치한 8호 주거지는 조사지역 내에서 가장 북쪽인 2지구 서남쪽 경사면에 조성되어 있었는데, 2지구 산등성이 공사구역 내에 포함되면서 절토(切土)되었고, 이 과정에서 주거지의 절반 이상이 유실되었다.
조사된 부분은 주거지의 서남쪽 수혈벽을 포함한 바닥층으로 서남쪽의 수혈벽은 115㎝ 정도가 남아 있었고 서북벽과 이어지는 부분이 둥글게 꺾여 있었다. 동남쪽 수혈벽과 바닥의 일부는 자연 유실된 것으로 판단되고 잔존된 수혈벽의 형태와 바닥의 범위로 볼 때 원래의 주거지 평면형태는 말각방형(抹角方形)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유실된 부분이 많아 정확히 알 수 없다.
바닥 범위선을 포함한 잔존된 주거지의 규모는 동서 길이 195㎝, 남북 너비 170㎝, 수혈벽 최대높이 13㎝로 화강암 풍화토를 파고 조성되었다.
주거지 내부에서 노지나 기둥구멍 등의 시설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출토유물로는 분청자편과 백자편, 옹기편, 기와편 등이 잔존된 주거지의 북쪽 바닥에서 소량 출토되었다.

4) 9호 주거지
남쪽 주능선의 동편 경사면에 위치한 9호 주거지는 1호 불명유구와 10호 주거지의 사이에 조성되어 있다. 주거지의 동남쪽 수혈벽과 바닥은 자연경사를 따라 유실되었는데 주거지의 잔존된 평면 형태는 앞이 터진 'ㄷ'자형에 가까우며, 화강암 풍화토를 경사지게 파고 조성되었다. 규모는 남북 길이가 280㎝, 동서 너비 150㎝, 수혈벽의 최대높이가 44㎝이다.
내부시설로는 북벽에 화덕시설이 설치되어 있었고, 반대편인 남벽에는 할석(割石)을 이용해 쌓은 시설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북벽의 화덕시설은 수혈벽을 반원형으로 파내어 굴뚝을 만들었고 아궁이의 좌우에는 할석 2개를 세워 솥 등을 걸 수 있는 시설을 만들었다. 아궁이의 바닥은 약간 오목하며 굴뚝으로 비스듬히 경사져 올라갔으며 아궁이의 주변은 소결되어 있었고 재층이 일부 확인되었다.
남벽의 할석 구조물은 수혈벽 안쪽에 설치되었는데 대체로 할석들이 마제형(馬蹄形)으로 모여있는 형태였다. 할석 중에는 2∼3개가 중첩되어 놓여진 것도 있고 바닥에서 약간 든 것들도 있었다. 할석 주변이나 바닥에 불 먹은 흔적은 없었다. 유물로는 주거지의 중앙부 바닥에서 분청자편과 백자편, 옹기편 등이 소량 출토되었다.

5) 10호 주거지
10호 주거지는 남쪽 주능선의 동쪽 경사면에 위치하며, 9호 주거지와 1호 건물지 사이에 조성되어 있다. 이 주거지의 동쪽 수혈벽과 바닥의 일부는 1호 건물지가 들어서면서 유실된 것으로 판단되며, 주거지 상부에는 1호 건물지의 유물 퇴적층이 덮여 있었다.
주거지의 잔존된 평면형태는 말각방형(抹角方形)에 가깝고 남벽과 북벽은 직선적이며 서벽은 중앙부의 화덕시설을 중심으로 꺾여 있었다.
주거지의 규모는 남북 길이가 290㎝, 동서 너비 260㎝, 수혈벽 최대높이가 26㎝로 화강암 풍화토를 경사지게 파고 조성되었다.
내부시설로는 서벽의 중앙부에 화덕시설이 설치되었는데 주거지 서벽은 이 화덕시설을 중심으로 약간 엇갈려 있었다. 수혈벽이 이렇게 엇갈리게 된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굴뚝에서 나온 연기를 산등성 위쪽인 북쪽으로 쉽게 배출시키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화덕시설은 아궁이 입구에 넓적한 판석을 놓고 여기서 서벽까지 수키와를 하나 얹어 굴뚝을 만들었다. 기와와 판석의 밑에는 앞서 설명한 적갈색 점질토로 고정시켰고 주변은 소결(燒結)되어 있었다.
유물은 주거지의 바닥 전면에서 출토되었는데 주로 분청자와 백자, 옹기의 파편이 대부분이었다. 주거지의 북쪽 바닥에서는 석제 구슬이 1점 출토되었다.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 외에 주거지의 동편과 상부의 퇴적층에서 분청자 마상배(馬上杯)와 백자대접, 접시 등 완형(完形)에 가까운 유물들이 출토되어 주거지 내부 출토품과는 대조를 이뤘다. 주거지 상부 출토품 중에는 굽바닥에 'ㅁ비'자가 쓰여진 접시편도 출토되었는데 이들 상층 출토유물은 10호 주거지보다는 1호 건물지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6) 11호 주거지
남쪽 주능선의 서쪽 경사면에 위치하며, 4호 주거지와 3호 건물지 사이에 조성되어 있었다. 주거지의 서쪽 수혈벽과 바닥은 자연 경사를 따라 유실되었고, 중앙부는 근래에 구덩이가 파여지면서 교란되었다.
주거지의 잔존된 평면 형태는 반원형에 가까우나 원래는 말각방형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주거지의 동벽은 대체로 직선적이며 둥글게 꺾여 북벽으로 이어졌다.
규모는 남북 길이 390㎝, 동서 너비 240㎝, 수혈벽 최대 높이 30㎝이다. 화강암 풍화토(花崗巖風化土)를 경사지게 파고 조성되었다.
내부시설로는 북벽의 모서리에 화덕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화덕시설은 아궁이 입구 좌우에 할석을 세우고, 수혈벽을 반원형으로 파내어 굴뚝을 만들었다. 아궁이의 바닥은 약간 오목한 편이며 굴뚝으로 바닥이 둥글게 경사져 올라갔다. 아궁이 너비는 17㎝이고, 전체 길이는 40㎝이다.
이 외에 특별한 내부시설이나 기둥구멍 등은 확인되지 않았다.
유물은 주거지의 바닥 중앙부에서 분청자와 백자, 옹기편이 소량 출토되었다. 그리고 숫돌 1점이 비스듬히 들린 채로 출토되었는데 원래 주거지 내부유물이었던 것이 주변이 교란되면서 제 위치에서 이동된 것으로 판단된다.

7) 12호 주거지
유적의 남쪽에 자리잡은 민묘의 동남쪽 경사면에 위치하며, 원삼국시대 5호 주거지의 북벽 일부와 중복 조성되었다. 5호 주거지가 파괴될 때 함께 파괴되어 주거지의 절반 이상이 유실되었다.
주거지의 잔존된 평면형태는 반원형에 가까우며 서벽과 남벽의 일부가 남아 있었다. 잔존규모는 남북 길이 320㎝, 동서 너비 160㎝, 수혈벽 최대 높이 59㎝로 화강암 풍화토를 비교적 수직에 가깝게 파고 조성되었다.
내부시설로는 서북쪽 수혈 벽을 둥글게 파내어 만든 화덕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아궁이 부분에는 아무런 시설이 확인되지 않았으며 굴뚝은 주거지 바닥에서 완만하게 꺾여 수직으로 경사져 올라갔다. 굴뚝의 내부에서 기와편이 출토되었고 주변은 소결되어 있었으며 이외에 기둥구멍 등의 기타시설은 확인되지 않았다.
유물은 주거지 중앙부 바닥에서 분청자와 백자, 옹기편 등이 소량 출토되었고, 남쪽 바닥에서 인화문(印花文)이 시문된 분청자 대접편과 저부편 등이 출토되었다.

(2) 건물지(建物址)

1) 1호 건물지
1호 건물지는 야산의 남쪽 산등성과 동남쪽 산등성이 갈라져 골이 지는 경사면에 위치하였다. 건물지가 폐기된 후 근래에 밭으로 경작되면서 상면이 깎여 나가 초석은 이미 유실되었고, 건물의 북쪽에 민기(民墓)가 중복·조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건물지에 대한 작업은 상부 표토층을 모두 제거하고 민묘 이장부를 정리하여 전면 노출시켜 조사하였다. 표토를 제거하자 곧바로 하부 적심석군(積心石群)이 나타났으며, 적심(積心)이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서 건물의 규모를 파악할 수 있었다.
건물의 규모는 길이 980㎝, 너비 735㎝로 정면 4칸, 측면 3칸의 장방형이며, 보칸과 도리칸의 구분 없이 적심 사이의 간격은 245㎝로 일정하였다.
건물은 골짜기 경사면을 평면 'ㄷ'자 모양으로 삭토하여 평탄하게 대지를 조성한 후 동남향으로 자리잡았다.
건물지 내·외부에서 출토된 유물은 많지 않으며 대부분은 유물은 건물지의 서북쪽 경사면 아래와 동북쪽 경사면에서 노출되었으며, 동북쪽 경사면에는 와적층(瓦積層)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 와적층은 건물지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아마도 건물이 폐기된 후 경작이 이루어지면서 이곳에 기와를 폐기하여 형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기와는 암·수키와 등의 평기와 뿐이며 막새나 망와 등은 없었다. 기와에 시문된 문양은 복합문(複合文)과 어골문(魚骨文), 원문(圓文) 등이다. 기와편 중에는 '卍'자가 시문된 명문(銘文) 기와가 건물지의 북쪽 경사면 아래 유물 퇴적층과 표토층에서 출토되었다. 비록 작은 파편 2점이고 건물지의 유물이라고 단정짓긴 어려우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건물의 성격이 일상 거주용의 건물로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음을 고려할 때 이 건물지의 용도를 여러모로 짐작케 해주었다. 분청자는 초화문(草花文) 등이 철화기법(鐵畵技法)으로 그려진 철화분청(鐵畵粉靑)이 대부분이며, 인화(印花), 귀양 기법의 분청들도 출토되었다. 이 외에 백자와 옹기 등의 생활 용기와 어강추(漁網錘)등이 출토되었는데 이들 생활용기들은 건물지의 상면과 서북쪽 퇴적층, 경사 아래의 동남쪽 퇴적층에서 주로 출토되었다.

2) 2호 건물지
남쪽 산등성의 동쪽 경사면에 조성되었으며, 이장되지 않은 민묘와 일부 중복되어 있었다. 따라서 민묘의 묘역과 중복된 부분은 조사하지 못하였다.
건물의 동쪽으로는 경사가 급하게 이어져 적심(積心)의 일부가 유실된 상태였으며, 표토층 바로 아래에서 생토면이 노출되었다. 건물지의 서쪽 적심석 사이에는 민묘가 중복·조성되었고, 그 서쪽 경사면에도 3기의 민묘가 조성되어 있었다.
건물은 이 산등성 동쪽 경사면을 일부 삭토하여 대지를 조성한 후 동남향으로 자리잡았다. 건물의 전체적인 규모는 일부분이 확인되지 않아 분명치 않았다. 건물지의 동남쪽에는 다른 적심석열과는 약간 방향이 틀어져 있는 원형 구덩이가 노출되었는데 내부에 적심석은 없었다. 그 주변에서 할석(割石)과 기와편, 소토편(燒土片) 등이 노출되어 있었는데 이 구덩이가 적심공인지의 여부는 판단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적심석이 분명한 것만을 토대로 건물의 규모를 살펴보면 남북 너비 770㎝, 동서 길이 772㎝이며, 남-북 3칸, 동-서 3칸의 적심석열이 확인되었다. 동-서 적심석열은 중앙 칸은 272㎝이고, 좌우 도리 칸은 약 250㎝ 었다. 남-북 적심석 사이의 간격은 235∼255㎝로 남쪽의 경사면 아래로 내려오면서 약간씩 넓어 졌다.
민묘와 중복된 부분은 더 이상 작업이 불가능하여 조사하지 못하였으나 묘역 하부에 기와 퇴적층이 계속 이어지는 것을 확인하였고, 건물의 동남쪽 적심석 주변에서는 할석이 부정형으로 노출되고 있었다.
건물지의 내·외부에서 출토된 유물은 기와가 대부분이었으며, 장방형 구덩이의 내부에서 출토된 기와도 문양이 서로 같았다. 2호 건물지의 기와는 1호 건물지에서 출토된 기와와 문양이나 크기가 거의 비슷한 것들이 많았다. 기와는 건물지의 상부와 서쪽 적심석 사이, 배수로 주변에서 주로 출토되었다. 건물지의 서북쪽 적심석 주변에는 부정형의 구덩이 내부에 기와와 자기, 옹기편 등이 할석과 뒤섞인 상태로 노출되었는데 건물지가 폐기된 후에 이 부분이 교란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외에 분청자와 백자, 옹기편 및 어망추 등이 전면에서 출토되었으며, 건물지의 동쪽 경사면 아래에서도 상당량의 자기편이 부식토 층에서 수습되었다. 이 경사면 아래의 유물 중에는 그릇 안쪽에 'X'자 모양의 기호를 표시한 분청자 접시와, 굽바닥에 '쇼비' 등의 명문이 언문으로 쓰여진 백자 저부편들이 출토되었다. 이 중 '쇼비'명의 백자편은 10호 주거지의 상층에서 출토된 'ㅁ비'명 백자편과 같은 것으로 판단된다.

3) 3호 건물지
산등성의 서남쪽 경사면에 위치하며, 이장되지 않은 민묘의 묘역과 중복되어 일부분만 조사되었다.
3호 건물지는 하나의 단일 건물지가 아니며 모두 12개의 적심석이 노출되었다. 적심의 크기와 방향으로 보아 대체로 2∼3기의 건물지 하부 적심석열이 중복된 것으로 추정되며 시기적인 차이도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건물의 상부가 바로 표토층에 해당되고 유구의 유실이 심해 건물의 규모와 형태, 중복 순서는 파악할 수 없었다.
적심석열은 모두 화강암 풍화토를 파고 설치되었으며, 이 중 민묘의 묘역과 인접하여 노출된 적심석열은 직경이 100㎝ 내외로 주변의 적심석열 중에서는 가장 큰 규모였다. 적심과 적심 사이의 간격은 대체로 남-북 210㎝, 동서 225㎝로 나타났다. 이 적심석열은 내부를 할석과 기와편 등으로 채웠는데 이로 볼 때 이전 건물지를 파괴 또는 개축하여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민묘의 서쪽 경사면에 위치한 또 다른 적심석열은 방향이 서로 엇갈린 형태였고, 적심 사이의 간격이 165∼270㎝로 불규칙하며 적심공의 크기와 방향에서도 정형 성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이 부분의 적심들은 직경이 50∼70㎝ 정도로 비교적 작은 규모였으며, 적심공내에서 와편은 출토되지 않았다.
이 적심석군의 서남쪽에는 평면 'ㄷ'자의 시설물이 있었다. 크기는 동서 길이 125㎝, 남북 너비 90㎝이며 최대 깊이는 19㎝였다. 상부에는 재층속에 기와편과 할석들이 뒤섞여 덮여 있었고, 내부는 모두 소결되어 있었다. 자기편 등은 출토되지 않았다. 이 시설은 건물의 아궁이 시설로 추정해 볼 수 있으나 분명치 않았다.
유물은 건물지 주변에서 기와편이 소량 출토되었고, 인화문(印花文)이 시문된 분청자편과 백자편 등이 수습되었다. 기와의 종류는 평기와 뿐이었다. 기와의 문양은 대체로 어골문(魚骨文)이 많으며, 1호·2호 건물지의 기와 문양보다 문양 사이의 간격이 넓은 편이었다. 적심공 내부에서 출토된 기와편도 형태나 제작수법은 대체로 같았다. 기와는 대부분이 파편으로 출토되어 전체 형태를 알 수 있는 것이 한 점도 없었으며 자기편을 포함한 대부분의 유물들이 모두 표토층에서 수습된 것이어서 어느 건물과 관련된 유물이라고 판단하기 어려웠다.

(3) 수혈유구(竪穴遺構)

1) 1호 수혈유구(竪穴遺構)
원삼국시대 3호 주거지와 조선시대 9호 주거지의 사이에 조성되었다. 규모는 남북 길이 210㎝, 동서 잔존너비 210㎝, 수혈벽 최대높이 21㎝이다. 잔존된 평면 형태는 'ㄷ'자 모양으로 동쪽이 트여 있으나 원래의 평면 형태는 방형(方形)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화강암 풍화토를 경사지게 파고 조성되었으며 바닥은 평탄하였다.
바닥에 점토를 까는 등의 시설은 없었고 기둥구멍이나 노지시설도 보이지 않았다. 내부에는 할석(割石)이 몇 개 불규칙하게 노출되었으며, 바닥 층에서 분청자와 백자, 옹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여타의 조선시대 수혈 주거지와는 평면 형태나 규모에서 차이가 나며, 내부에 화덕시설이 설치되지 않은 점도 차이가 났다. 또 수혈유구의 동쪽에 인접하여 9호 주거지가 위치하므로 두 유구 사이에 시기적인 선후 관계가 있을 것으로 판단되나 표토를 제거한 후 곧바로 유구가 노출되어 알 수 없었다.

2) 2호 수혈유구(竪穴遺構)
원삼국시대 4호 주거지의 동쪽에 조성된 수혈유구이다. 규모는 남북 폭이 280㎝, 동서 너비 280㎝, 수혈벽 최대 높이 40㎝이다. 평면 형태는 타원형( 圓形)에 가까우며 화강암 풍화토를 경사지게 파고 조성되었다.
수혈의 바닥은 동쪽과 북쪽 바닥이 높고, 반대편인 서남쪽 바닥으로 경사져 흘러 내렸다. 내부에는 불맞은 흔적이나 화덕시설 등은 없었고 기둥구멍도 보이지 않았다.
수혈의 서남쪽 바닥에 할석이 하나 놓여 있었고 주변에서 기와편과 백자편, 옹기편 등이 출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