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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족부락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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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호동 이현동 갈전동 부수동 황호동 삼정동
미호동

 

 


동족부락이란?
    동족부락이란 동일조상에서 나온 동본동성이 한 부락 또는 한 지방에서 집단 거주하는 것을 말한다. 1930년대의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마을의 반수 이상이 동성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마을 구성하는 마을사람 전원이 한 성씨를 갖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로 한 성씨가 비록 주민의 전부는 아니라 하더라도, 마을을 주도 할 때 그 마을을 동족부락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동족부락의 개념을 부락 내 동성집단의 구조와 기능이 비동성 각성(非同姓各姓) 거주집단까지를 포함하는 부락 전체의 그것과 일치하거나 또는 지배적 영향력을 갖는 부락을 동족부락이라 할 수 하기도 한다.

    본 조사에서 동족부락이라 함은, 하나의 자연촌락에서 하나의 성씨 혹은 두 세개의 성씨가 동본으로 세거하면서, 존재할 때 동족부락이라 설정하여 파악하였다. 조사의 범위는 대덕구로 한정하였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옛 회덕현의 행적구역에 포함되어 있었던 동구 직동·가양동·흥룡 등과 유성구 전민동 일대가 제외되었다.
대덕의 동족부락
    대덕구 지역에서 파악된 동족부락은 약 40개 마을이었다. 물론 이러한 마을들 가운데에는 한마을에 2∼3개성이 복합되어 있는 경우도 각각 별개의 동족부락으로 파악되었다. 그런 예로 와동 평촌의 충주박씨·순창설씨, 장동 산디의 경주최씨·옥천전씨·창령조씨, 갈전동에 원주변씨·제주고씨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자연촌락을 하나의 마을로 보면 37개 촌락에 해당된다.

    그런데 대덕구의 자연촌락은 대덕구가 1960년대 이후 점차 도시화·산업화하는 과정에서 개발되어 현재 동족부락으로 존재하는 마을은 극히 적다. 조사된 동족부락 가운데 현재까지도 동족부락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곳은 다음과 같다.
    연축동 윗골의 경주김씨, 와동 평촌의 충주박씨·순창설씨, 와동 남월의 광산김씨, 비래동 비래본동의 고성이씨,
    석봉동 한절구지의 진주강씨, 평촌동의 전주이씨, 장동 산디의 경주최씨·창령조씨·옥천조씨, 장동 텃골의 밀양박씨,
    장동 진골의 은진송씨, 장동 욕골의 경주최씨, 용호동 하용호의 진주강씨, 이현동 심곡의 경주김씨,
    이현동 이현의 동래정씨, 갈전동 갈전의 원주변씨, 삼정동 강촌의 진주강씨, 삼정동 민촌의 여흥민씨,
    삼정동 이촌의 경주이씨, 미호동 벌말의 은진송씨, 미호동 신촌의 연안차씨.
    에서와 같이 모두 19개의 자연촌락이다. 이러한 촌락은 현재 대부분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이거나 대청댐 주변의 상수도보호구역이어서 온전할 수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19개 마을을 제외한 23개의 마을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이들 자연촌락이 사라지게 된 것은, 첫째로는 대청댐 건설로 황호·부수동처럼 사람이 거주하였던 마을 전체가 수몰된 경우이며, 둘째로는 신탄진동·덕암동에서처럼 지역이 도시화되면서 상업지역과 주택지로 개발된 것이고, 셋째로는 대화동의 1·2 공단과 목상동·문평동·신일동의 3·4 공단처럼 산업단지로 개발된 경우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상서동·평촌동처럼 국가기업이 입주하고 주변에 공장들이 자연스럽게 들어와 공업지대가 되었다. 이러한 개발로 자연촌락들이 흔적을 찾을 수조차 없게 되었고, 아울러 촌락의 인문 사회적 환경도 파괴되었다.



동족부락의 형성시기
    각각의 동족부락들이 언제에 형성되었는가하는 점이다. 대덕구에 현재 남아있는 동족부락 가운데 정확하게 부락이 형성된 시기를 알 수 있는 경우는 극소하다. 다만 후손들의 증언으로 입향조의 생몰 년대를 족보상에 찾아서 확인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와 같은 작업을 통해서 입향시기를 대략 확인할 수 있는 경우는 모두 27건이었다.

    이들 입향시기를 대략 세기별로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다.
     

14세기

15세기

16세기

17세기

18세기

1

4

10

11

1

27

    * 시대가 걸쳐있는 경우는 입향조가 성년이 되는 주 활동시기를 기준으로 세기를 분류했다.

    이와 같은 표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약간의 문제점이 있지만 자연촌락 형성의 대세를 파악하는데 에는 큰 문제점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위 표에서처럼 회덕현의 동족 부락의 형성은 15세에서 시작하여 16·17세기에 주로 형성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15세기 이전에는 회덕에 동족부락 내지는 자연촌락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실제로 송촌동의 경우에 은진송씨들이 입향하기 전에 본관을 알 수 없는 김씨가 살았었기에 김가쟁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으며, 또한 장동 산디마을의 경우 가장 먼저 입향한 성씨가 창녕조씨인데 이보다 먼저 정씨들이 거주하였다 한다. 그러나 현재 회덕지역에서 세거하였던 성씨들 중, 15세기 이전에 세거하였던 주민에 대해서는 파악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15세기 이전에 회덕지역에 살았던 성관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전해오는 자료도 없고, 이들 가문이 후대에까지 회덕지역에 거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째든 회덕지역의 동족부락이 16·17세기에 와서 주로 형성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시대 전형적인 동성마을은 대체로 17세기 이후에 형성되어, 18·19세기를 거치면서 보편적인 마을의 형태로 발달하였다고 보는 기존의 연구와는 다른 결과이다. 즉 그간의 연구들은 동성마을의 형성은 조선후기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연구는 각각의 마을들에 대한 사례 연구를 통해 얻은 연구결과이므로 이를 전체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좀 무리가 있지 않나 싶다. 아마 지역에 따라 다르겠지만 한 지역에 형성된 모든 동성마을을 조사하여 파악한다면 보다 효과적이라고 생각된다. 그 점에서 금번 회덕에서 얻은 조사결과는 의미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동족부락 형성의 배경이 되는 입향사유를 조사하였다. 그런데 입향사유을 확인 할 수 있는 경우가 몇 사례되지 않았다. 모두 15개 마을만이 입향사유를 알 수 있었는데, 이 가운데 처향으로 입향한 것이 13건이었고, 외향이 1건, 지방관으로 왔다가 정착한 사례가 1건이다. 이처럼 처향을 따라 입향한 사례가 많은 것은 당시의 상속관행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조선전기부터 대략 17세기까지의 상속제는 자녀간 균분상속이었다. 따라서 딸도 친정으로부터 아들과 똑같이 재산을 물려받았고, 친정의 제사도 지냈다. 이러한 상속관행이 처향으로 입향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그리고 지방관으로 그 지방에 부임하였다가 그 지역에 정착하는 경우도 조선시대에는 흔히 있는 일이다.


대덕의 동족마을 소재지
    우리나라의 마을은 그 마을의 민가가 밀집한 마을을 집촌(集村)이라 하고, 민가가 흩어져 있는 경우를 산촌(散村)이라 한다. 동족부락의 경우에 집촌이 많으며 산촌이 적은 편이라 한다. 실제로 동족부락이 위치한 곳의 지세를 조사한 선생영조(善生永助)에 의하면 1,685개 마을에서 산기슭에 위한 것이 602개, 평야에 위치한 마을이 356개, 배산임수에 위한 것이 277개, 강가에 위치한 연하부락이 98개, 계곡에 위치한 마을이 97개, 바다에 임한 임해부락이 62개, 구릉에 위한 것이 54개, 산음에 위치한 것이 51개, 분지에 위치한 것이 44개, 그리고 연도에 위치한 것이 44개 였다고 한다.

    그런데 회덕의 조사에서 동족부락으로 파악된 마을을 구분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물론 이와 같은 분류는 분류자에 따라서 분류상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산기슭

평 야

구 릉

계 곡

연 하

14(36%)

8(21%)

7(18%)

2(5%)

8(21%)

    위의 분류가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갖는다면 회덕의 경우 산기슭에 위치한 부락 36%로 가장 많고, 평야·계곡·연하에 위치한 동족마을의 숫자는 비슷한 비율이다. 이러한 것은 회덕이 위치한 지형적인 여건과 관계가 깊다고 생각된다. 즉 회덕 동북쪽 응봉산과 계족산에 연한 마을들은 대부분 산기슭에 위치하였다. 예컨데 계족산 동쪽의 삼정동에 위치한 강촌·이촌·민촌, 연축동의 웃골, 갈전동 갈밭, 이현동의 심곡·이현 등의 마을들이 그러하다. 그리고 대화동의 구만이, 용호동의 하용호, 부수동의 부수골과 형지원, 황호동의 느릇구지, 미호동의 벌말·신촌·숫굴 등은 연하부락으로 분류할 수 있다. 오정동의 새뜸, 읍내동의 당아래, 와동의 평촌과 남월, 문평동 들말, 용호동 하산디 등은 평야로 분류될 수 있다. 기타 석봉·덕암·상서동·평촌동에 위치한 마을은 구릉성 마을이라 할 수 있다. 회덕의 경우 마을이 지형상 어느 곳에 위치하였는가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 마을이 위치한 지형에 따른 영향이 가장 큰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산기슭에 위치한 마을일수록 집촌(集村)이 대부분이었다. 그 예로 장동의 산디·텃골·욕골, 대화동의 망골, 이현동 심곡·이현, 갈전동의 갈전, 삼정동의 강촌·민촌·이촌 등이다. 그리고 평지와 구릉지대에 위치한 마을일수록 산촌이 많았다. 예컨데 평촌·상서·덕암동 일대의 경우에는 마을들이 있는 곳을 합하여 열두 방두마루라 하였다 한다. 열두 방두마루는 이 지역에 있는 자연촌락이 12개정도 이었기 때문이라 한다. 이는 이곳의 자연촌락이 분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목상·문평·신일동의 경우도 그곳의 마을들을 합하여 을미기라 하였다 한다. 을미기는 등에 붉은 점이 있는 뱀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곳의 마을들이 뱀의 등에 붉은 점이 있는 것처럼 띄엄띄엄 산촌되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산촌이라 하여도 이들 자연촌락 사이에는 집촌의 경우와 같은 하나의 생활권과 사회권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 자연촌락 사이에는 함께 두레를 조직하거나 연반계 등, 마을 공동체의 생활을 함께 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 마을조사시 주민들이 자연촌락을 하나 하나 별개로 파악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증언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비록 산촌으로 분산되어 생활하였지만 한 마을과 똑같이 생활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산촌이냐 집촌이냐 하는 것도 마을이 위치한 지형 상에 따라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족마을의 구조
    한 동족부락의 구조를 언급하게 될 때 그 마을에 양반 또는 상민이나 천민만으로 이루어진 마을의 존재는 매우 드물다. 대체로 마을의 신분구성에 있어서 어느 신분 층의 숫자가 주도적으로 많았는가 또는 특정 신분의 인구수와 관계없이 그 마을에서 어느 신분 층이 주도적이었는가에 따라서 반촌·일반 촌으로 나뉠 수 있을 것이다.

    회덕에서 파악된 동족부락의 경우는 대부분 반촌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회덕의 동족부락이 대부분 반촌으로 이루어진 것은 회덕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양반이 특히 더 많았기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느 마을이던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양반은 있기 마련이고, 양반들은 항상 마을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어느 자연촌락에 양반만 거주한다든지, 아니면 양민이나 천민만이 거주하는 마을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동족부락으로 파악되는 대부분의 마을들은 양반이 그 마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거나, 비록 호구 수는 적어도 양반이 주도하였던 마을은 반촌으로 파악될 수밖에 없다.

    회덕에서 파악된 자연촌락의 경우에도 이런 방식으로 파악하였기 때문에 대부분 반촌으로 파악된 경우이다. 뿐만 아니라 양반들이 주도권 잡고 있던 자연촌락들은 양반들이 소유한 토지가 많았고, 따라서 토지에 경제적 기반을 둔 조선사회에서 양반들의 사회적 이동이 다른 신분 층에 비하여 적기 때문에 오래도록 후대까지 자연촌락이나 집성촌으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같은 반촌의 경우에도 그 마을에 거주하는 양반들의 사회적 위상에 따라 어느 정도는 서열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회덕현의 경우에 있어서 현 내의 주도적 성씨가 어느 성씨냐에 따라 붙여진 '남송북강(南宋北姜)'이라는 말이 그러하다. 이와 관련하여 {회덕향안}의 서문에는
    내가 생각하건대 호서(湖西)에는 옛부터 삼대족의 이름이 있었으니, 연산의 김(金)과 이산의 윤(尹)이고 그 하나는 즉 회덕의 우리 송씨였다. 그러므로 향안에 수록된 송씨가 많고, 일향 중에 또 남송북강(南宋北姜)이라는 칭(稱)이 있으니 강씨가 다음으로 많다. 무릇 김·윤·송 삼족은 서로 혼하여 친목케 된 의가 더욱 다른 바가 있으니 그 가장 현저한 성씨들은 경주김·연안이·동래정·반남박·순천박씨이며, 황·한·연·변·노·양씨 등이 별처럼 이어져 그 거주지와 선영이 이어져 있고, 경조사에 빠지지 아니하니, 이미 족히 은근히 접촉하고 기쁨과 사랑을 맺고 있다.
    라 하여 한지역내의 신분상의 위상의 차이를 보여 준다. 즉 회덕지역은 은진송씨와 진주강씨들이 많고, 그 다음으로 경주김씨, 연안이씨, 동래정씨, 반남박씨, 순천박씨 순 이었으며, 그 다음으로는 회덕황씨, 청주한씨, 곡산연씨, 원주변씨, 신창노씨, 남원양씨 등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성씨는 회덕 내에서 대부분 동족부락을 이루고 있었으므로 동족부락 사이에도 그 마을에 근거를 둔, 양반의 사회적 위상에 따라 어느 정도는 서열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와 같이 회덕을 대표하는 양반가문이 세거하였던 자연촌락은 촌락의 위치가 산기슭과 구릉 지대에 존재하였고, 평야지대에 촌락을 형성한 경우는 몇 사례되지 않았다. 예컨대 은진송씨의 송촌, 진주강씨의 석봉동, 경주김씨의 중리, 동래정씨의 이현, 청주한씨의 중리동 한촌, 곡산연씨의 황호(부수), 원주변씨의 갈전 등이 그러한 예로 들 수 있다. 그리고 산기슭과 구릉지대에 형성된 촌락들이 다른 위치에 형성 된 마을에 비하여 비교적 이른 시기에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회덕의 경우에 산기슭과 구릉지에 위치하는 촌락이 형성된 시기도 오래되었고, 회덕을 대표하는 양반들이 세거하였다. 그 까닭은 아마도 산기슭에 위치한 마을들은 마을 앞으로 강이 흐르는 경우, 배산임수의 마을이 되는 것으로 풍수 상 명당이기 때문에 이 곳의 지역을 먼저 차지하였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실제로 회덕의 경우에 촌락이 풍수적으로 명당이라고 전하는 곳이 많다. 예컨대 부수동 부수골의 경우에 연화부수 형국의 명당이 있었고, 그리고 용호동이 용의 형국이었다고 하는 것이 그러한 예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여지도서}의 회덕조에 의하면 회덕의 경작지는 한전이 수전의 2배나 되었던, 당시의 실정에서 경작지가 있는 구릉과 산기슭에 양반들이 먼저 반촌을 마련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회덕은 대동법에서도 산군(山郡)에 해당하여 해군(海郡)에서 미로 납공하였던 것과는 달리 목면으로 납공하였다.

    따라서 요약하면 회덕의 촌락은 대부분 반촌이었고, 반촌들도 그곳에 거주하는 양반들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어느 정도 서열적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또한 반촌들은 회덕의 자연촌락 가운데 비교적 이른 시기에 형성되었고, 촌락의 위치는 구릉지대나 산기슭에 주로 위치하였다. 이는 회덕의 한전이 수전의 2배나 되어 산기슭이나 구릉이 경제적으로 유리하였으며 또한 이곳이 풍수적으로 명당에 해당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세거성씨
    대덕구에 세거하였던 성씨에 대하여서 알아보는 방법은 문헌에 의한 방법에 크게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현지조사에서는 주로 양반들이 세거하였던 동족마을에 대하여서만 조사가 가능하고, 동족마을 내에서도 양반들의 세거 실태만이 파악될 뿐 평민들의 세거 실태는 잘 파악되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는 평민들은 토지소유가 많지 않고 소작하는 경우가 많아서 지역에 정착력이 취약하였고, 이러한 까닭으로 사회변화에 민감하여 입향과 출향이 빈번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덕에 세거하였던 세거성씨는 양반들을 중심으로 파악하는 방법밖에 없다.

    문헌을 통해서 회덕지방에 세거하였던 사족들의 성관(姓官)을 파악하여 보기로 하겠다. 가장 먼저 회덕의 토성에 대하여 언급한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이다.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에는 회덕의 토성(土姓)이 4이었는데 황(黃)·임(任)·이(李)·방(房)이요, 망성(亡姓)이 1이니, 곽(郭)이요, 정민역(貞民驛)의 속성(續姓)이 2이니, 배(裵)·김(金)이다.
    라 하여 조선전기 회덕현의 세거성씨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다. 즉 회덕의 토성(土姓)은 황(黃)·임(任)·이(李)·방(房) 등 4개의 성씨였다. 여기서 토성이라 함은 고려초 성씨의 분정시 그곳에 토착하면서 지배적 위치에 있었던 유력한 씨족, 또는 그곳을 본관으로 하면서 읍사(邑司)를 구성하였던 성씨집단을 지칭한다. 따라서 고려말 조선초 회덕지방의 유력한 토착 성씨는 황(黃)·임(任)·이(李)·방(房)씨 등이었음 알 수 있다. 그리고 회덕의 망성(亡姓)은 곽(郭)씨이었다. 여기서 망성이라 함은 종래의 토성이 소멸되거나 타지로 이주하여 {세종실록지리지} 작성을 위하여 성씨들을 파악할 당시에는 그 곳에 없는 토성을 가르키는 것이다. 따라서 곽씨는 조선 초에는 회덕에 세거하였던 성씨이었으나 그후 언제가 소멸되어 {세종실록지리지} 작성 시에는 회덕에 소멸된 성씨가 되었다. 그리고 정민역의 속성은 배(裵)씨와 김(金)씨이었다. 그런데 속성이라 함은 종래에 없는 성씨가 관(關)에 추가로 등재된 성씨를 가르킨다. 따라서 {세종실록지리지} 편찬시 회덕에는 배씨와 김씨가 새롭게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세종실록지리지}가 간행될 당시 회덕의 세거성씨는 황(黃)·임(任)·이(李)·방(房)·배(裵)·김(金) 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후 회덕의 세거성씨는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李)·임(任)·황(黃)·방(方)·곽(郭), 배(裵)·김(金)
    라 하여 변화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16세기 초반 회덕의 세거성씨는 이(李)·임(任)·황(黃)·방(方)·곽(郭)씨 와 배(裵)·김(金) 등이었다. 이는 {세종실록지리지} 편찬 당시에는 망성이었던 곽씨가 다시 세거성씨로 파악된 점만이 다르다. 그리고 1760년대 간행된 {여지도서}에도 큰 변화는 없다. 이런 점에서 보면 회덕지방은 조선전기에는 세거하였던 사족 층에 큰 변화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회덕의 세거성씨에 대하여 잘 보여주는 것은 영조 대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회덕읍지}이다. {회덕읍지}의 성씨 조에는
     
본현(本縣) : 이씨(李氏)·임씨(任氏)·황씨(黃氏)·방씨(方氏)·곽씨(郭氏)· 배씨(裵氏)·김씨(金氏)(모두 驛이 있다.)
신증(新增) : 우거(寓居)한 성씨(姓氏)로는 송씨(宋氏)·김씨(金氏)·이씨(李氏)· 조씨(趙氏)·정씨(鄭氏)·강씨(姜氏)·연씨(延氏)·박씨(朴氏)· 노씨(盧氏)·백씨(白氏)·변씨(邊氏)·최씨(崔氏)·전씨(全氏)· 권씨(權氏)·홍씨(洪氏)·임씨(林氏)·방씨(房氏)·장씨(張氏)
    라 하여 본현에 5개 성씨와 역성(驛姓)이 2개 성씨 등 모두 7개 성씨가 있고, 신증으로 18개 성씨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회덕의 경우 조선후기에 이르면 대거 새로운 사족들이 입향하여 회덕에 세거하기 시작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신증으로 {회덕읍지}에 새롭게 파악된 18개의 성씨들의 본관을 구체적으로 파악하여 보면, 본현에 나타난 이씨는 경주이씨, 임씨는 풍천임씨, 황씨는 회덕황씨, 방씨는 본관미상, 곽씨는 현풍곽씨, 배씨는 본관미상, 김씨는 경주김씨이고 신증에 기록된 송씨는 은진송씨, 김씨는 경주김씨, 이씨는 연안이씨, 조씨는 임천조씨, 정씨는 동래정씨, 강씨는 진주강씨, 연씨는 곡산연씨, 박씨는 반남(혹은 순천이나 충주)박씨, 노씨는 신창노씨, 백씨는 수원백씨, 변씨는 원주변씨, 최씨는 전주(혹은 경주)최씨, 전씨는 옥천전씨, 권씨는 안동권씨, 홍씨는 남양홍씨, 임씨는 보안임씨, 방(房)씨는 본관미상, 장씨 (인동)장씨 등이었다.

    {회덕읍지}에 신증으로 새로 기록된 18개의 세거성씨들의 입향 시기를 대략적으로 살펴보면 은진송씨 15세기, 경주김씨 16세기, 연안이씨 16세기, 임천조씨 미상, 동래정씨 16세기, 진주강씨 15세기, 곡산연씨 15세기, 반남박씨 16세기, 원주변씨 15세기, 옥천전씨 17세, 안동권씨 16세기 등에 해당된다. 따라서 이들 신증으로 기록된 성씨들이 조선 중·후기에 회덕에 입향하여 {회덕읍지}에 신증으로 등재된 것이 아닌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동국여지승람}과 {여지도서}의 성씨 조에서는 이들 성씨들이 왜 등재되어 있지 않았는가 이며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 어째든 조선후기 {회덕읍지}가 간행될 당시 회덕의 대표적인 세거 성씨는 본현 5개성, 속성2, 신증 18개성 등 모두 합하여 25개의 성씨가 세거한 것을 알 수 있다.

    세거성씨와 관련하여 조선후기 회덕에 세거하였던 사족들의 실태를 가장 보여주는 것은 「회덕향안」이라 할 수 있다. 회덕「향안」과 「청금록」에 등재된 각성과 그 입록자의 숫자를 보면 다음과 같다.

향안원

106

36

30

20

10

10

9

8

7

5

5

5

4

1


향안상

182

47

33

26

19

15

15

8

7

6

5

4

3

1

1


향안하

42

17

14

14

13

4

4

4

2

2

2

2

1

1


향안속

324

90

54

53

48

30

29

24

13

10

8

6

6

5

4

2

2

2

1

1


청금록 상

166

39

22

22

21

17

12

9

5

5

4

4

3

2

2

1

1

1

1

1

1

1

1

1

1


청금록 하

270

42

28

27

26

15

9

6

5

5

4

4

4

3

2

2

2

1

1

    이러한 기록을 통해 회덕 지방에서 세거하던 성씨 중, 주도하던 성씨가 어느 성씨였으며, 또한 어떤 성씨들이 회덕 지방에 세거하여 왔는지를 파악 할 수 있다. 즉 조선후기 「향안」이 작성되던 시기의 17세기에는 은진송씨와 진주강씨 가장 족세가 우세하였으며, 「청금록」이 작성되던 시기에는 은진송씨·경주이씨 등의 족세가 우세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선후기 회덕의 세거 성씨들이 『청금록 상』에 가장 많은 성씨를 등재하고 있는데, {청금록 상}에 의하면 모두 25개 성씨가 등재되어있다. {회덕읍지}에는 등재되어 있지 않은 성씨로 {청금록 상}에 등재된 성씨는 남원양씨·윤(尹)·변(卞)·신(申)·지(池)·오(吳)·서(徐)·남(南)·류(柳)·안(安)·나(羅) 등 11개 성씨이다. 따라서 {회덕읍지}와 {청금록 상}에 등재된 성씨들을 합치면 36개 정도의 성씨가 회덕 지방에 세거하던 성씨라 할 수 있다. 그런데 1782년 이만운에 의해 증보된 {증보문헌비고} 씨족고에 회덕의 성씨로는 회덕권씨·회덕김씨·회덕노씨·회덕문씨·회덕민씨·회덕방씨·회덕석씨·회덕송씨·회덕신씨·회덕양씨·
    회덕우씨·회덕원씨·회덕유씨·회덕임씨·회덕장씨·회덕정씨·회덕주씨·회덕최씨·회덕하씨·회덕황씨
    에서와 같이 20개 성씨이다. 그러나 {증보문헌비고}의 [씨족]고는 당시 회덕 지방의 씨족의 실정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 왜냐하면 당시 사족들의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회덕향안}에 등재되어 있는 성씨 중 상당수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진주강씨·청주한씨·원주변씨·순천박씨·충주박씨·곡산연씨 등 회덕을 대표하는 사족의 성관들이 빠져있다. 이러한 사실은 {증보문헌비고} [씨족]고가 당시 실정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함을 보여준다 생각된다.

    어째든 조선후기 회덕에 세거하였던 성씨들은 {향안}과 {청금록} 그리고 『회덕읍지』에 올라있는 성관들이 조선후기 회덕 지방을 대표하는 성씨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회덕의 세거성씨 일람표
     

동 및 마을명

관향 성씨

파 명

입향조

입향 년대

입향전
거주지

호수

입향사유

분촌

오정동 오물

은진 송씨

목사공파
집의공파

 

 

회덕
읍내동

20∼30호



대화동 구만이

은진 송씨

 

 

 

 

15호



대화동 망골

선산 곽씨

 

 

 

옥천

10호



읍내동 당아래

은진 송씨

제월당파
문희공 자손

 

 

 

7∼8호



읍내동 후곡

은진 송씨

제월당파

 

 

 

60호



연축동 윗골

경주 김씨

계림군파

김권집

약200년 전

충남 논산

6호



와동 평촌

충주 박씨

판서공파

박 소

14세기

 

30호

처향
합천이씨

광주(박순)
서구 도마동

와동 평촌

순창 설씨

진사공파

설광리

17세기초

충북 보은

6호

처향
충주박씨


와동 남월

광산 김씨

 

 

 

 

20호

 

 

송촌동 송촌

은진 송씨


송명의

14세기말
15세기초

개성


처향
회덕황씨

회덕일대

중리동
아랫송촌

경주 김씨

계림군파

김광유

16세기말


7∼8호

처향
은진송씨

회덕일대

중리동
한촌

청주 한씨

장도공파

한수성

15세기말
16세기초

경기도
과천

100호

처향
진주강씨

회덕, 구즉

비래동
비래본동

고성 이씨

동추공파

이 비

15세기말

경기도
녹양리

40호

 


석봉동
안골

경주 이씨

국당공파

이달충

16세기


20호

 

미호, 석봉
용호동

석봉동
한절구지·안골

진주 강씨


강문한

15세기말
16세기초

충남 온양


처향
은진송씨

석봉, 미호
삼정동
동구 직동

석봉동 망골

반남 박씨

호군병중
제이자
사직진파

박세영

15세기말
16세기초

 

10호

처 향
진주강씨

옥천 덕암동

목상동 남해

김해 김씨

 

 

 

 

20호

 

 

문평동 들말

밀양 손씨

진사공파

손중사

17세기
후반

유성구
금고동

20∼30호

처향
창녕성씨

금고동
문평동

덕암동 망골·
서가작골 ·덕암

반남 박씨

호군병중
제이자
사직진파

박흥남
박향
박인남

16세기초
이후

 

25호

 

옥천

덕암동 진구례

연산 서씨

통덕랑파

서주세

17세기말
18세기초

홍성군
귀황면

 

처향
반남박씨

 

상서동 상서당

은진 송씨

송창공파

송수록

15세기말
16세기초

대덕구
송촌동

30호

 

진잠 기성,
장동, 상서,
오정동,
유성 등

평촌동

전주 이씨

임영대군파
5대손
독촌공 세계

이견봉

16세기말
17세기초

 

30호

회인현감
재직 후
회덕으로
입향

 

장동 산디

창령 조씨

승지공파

조명덕

17세기 중반이후

 

7호

 

장동
새뜸

장동 산디

경주 최씨

경주최씨
화수공파

최의신

17세기

전반∼17 세기후반

청원군
문의면

8호

 

유성 탑립.
장동 욕골.
장동 새뜸.

장동 산디

옥천 전씨

산디파

전상길

17세기 후반

18세기 전반

충북 옥천

5호

처향
은진송씨

 

장동 텃골

밀양 박씨

승지공
부정공
참의공파

박승렬

 

 

15호

 

진잠 세동리

장동 징골

은진 송씨

송창공파

 

 

 

15호

 

 

용호동 하용호

진주 강씨

복천파

 

17세기
후반?

신탄진
석봉동

10호

 

 

용호동 하산디·안골

경주 이씨

제정공파

이굉

16세기
후반?

 

70호

 

 

이현동 심곡

경주 김씨

계림군과

김덕음

17세기 전반

충북 청원군
남일면

20호

 

 

이현동 이현

동래 정씨

 

정복시

16세기
후반?

 

10호

 

 

갈전동 갈전

원주 변씨

부마공파

변견

15세기 초반
~후반

경기도
남양주
진건면

30호

처향
은진송씨

부수동
황호동

갈전동 갈전

제주 고씨

 

고사성

17세기?

 

 

처향
은진송씨

목상동

부수동
부수골 형지원

곡산 연씨

 

연정설

15세기 전반

16세기 중반

함흥(?)

100호

처향
청원군
현도면
진주유씨

황호동
평택보승

황호동
누룻구지

경주 김씨

 

 

 

 

20호

 

 

삼정동 강촌

진주 강씨

 

강학노

17세기

대덕구
석봉동

30호

 

 

삼정동 민촌

여흥 민씨

 

민충원

 

 

 

외 향

 

삼정동 민촌

경주 이씨

제정공파

 

17세기

대덕구
석복동
용호동

25호

 

 

미호동 벌말

은진 이씨

삼가공파

송필종
송필수

 

대덕구
송촌동

 

 

 

미호동 신촌

연안 차씨

지헌공파

차제로

16세기

 

20호

처향(?)

 

미호동 숫굴

경주 이씨

제정공파

 

 

대덕구
석봉동

22호